이제 갓 어느 정도의 규모를 확보한 중소기업의 얘기. 전쟁터 같은 시장에서 겨우 살아남아 이제 남들처럼 로고마크를 만들어 상품, 건물, 광고에 사용하고 싶은 생각에 기업이미지(CI)를 디자인 에이전트에 의뢰했다. 에이전트 측에서는 좋은 CI를 만들려면 고객 서베이를 할 필요가 있다는 등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그동안 생존 자체가 목표였던 경영자는 이 대목은 건성으로 듣는다. 그저 멋있는 심벌마크 하나 나오면 만족할 듯한 눈치다.
“사업을 하니 신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 겁니다. 신용이란 무엇입니까.” 이렇게 말하면 조금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소비자와 기업 간에도 신용은 있고, 저 기업 제품은 어떤 대목이 믿을 만하다는 신뢰 혹은 인상, 그게 바로 기업이미지”라고 말하면 그때서야 에이전트의 설명을 진지하게 듣기 시작한다.
기업이미지란 개인의 인상과 다를 것이 없다. 개인의 인상이 알게 모르게 타인과의 친소관계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듯 기업이미지도 기업과 소비자의 관계에 영향을 준다. 포커스그룹과 같은 해외의 유명 컨설팅업체에서는 기업과 소비자의 관계를 제품의 기능, 품질, 가격과 같은 1차 특징, 목표 시장의 사회 경제적 계층이 결정하는 2차 특징, 기업의 이미지라는 3차 특징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구분한다. 이 가운데 3차 특징의 비중이 커질수록 관계가 장기적이고 안정적이며 경쟁사가 모방하기 어렵다고 한다.
개인의 인상은 그 사람의 생각 행동 외모의 3요소가 결정한다. 기업이미지도 마찬가지다. 세계적 디자인 기업 카레 누아르의 설립자이자 마케팅 디자인의 거장인 제라르 카롱에 따르면 개인의 생각은 기업의 경영전략, 방침과 같은 기업 이념에 해당하고 개인의 행동은 제품 혹은 서비스의 질, 가격, 직원의 응대방법 등 소비자와 직접 접촉하는 부분, 외모는 기업의 로고마크, 제품과 제품 패키지, 차량, 광고, 간판 등 디자인에 해당된다. 그는 이 세 가지의 종합이 한 기업의 문화요 이미지라고 했다. 이 세 가지는 각기 마인드 아이덴티티, 행동 아이덴티티, 시각 아이덴티티라고도 한다.
이 세 요소는 일관성이 있어야 하고 균형이 맞아야 소비자들의 마음속에 견고하게 자리 잡을 수 있다. 일관성이 없고 균형이 맞지 않으면 많은 돈을 들여 이미지 메이킹을 해도 소비자의 마음에 파고들지 못할 뿐 아니라 때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남길 수도 있다. 이것이 지난 25년간 무려 1200개의 브랜드 아이덴티티 디자인과 1만3000여 개에 이르는 패키지를 디자인해 온 카롱이 꼽는 브랜드 디자인의 핵심이다.
이런 점에서 모범 사례로 꼽을 수 있는 기업이 프랑스의 타이어회사 미슐랭이다. 미슐랭은 프랑스 10대 기업에 들고 타이어업계에서는 세계 1, 2위를 다투지만 매우 소박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19세기 말 창업한 이래 지금까지 가족경영을 하면서도 타이어 한길만 걸었다. 본사도 파리로 옮기지 않은 채 처음 창업했던 클레르몽페랑에 향토기업으로 남아 있다. 경영자가 매스미디어에 등장하는 일도 드물어 본분을 지키며 기업활동에 전념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동시에 적극적이라는 이미지도 가졌는데, 활동반경이 국제적으로 매우 넓기 때문이다. 미슐랭은 11개국에 현지공장을 설립했으며 하루에 거의 39만 개의 타이어를 생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특징들은 미슐랭의 기업이념, 다시 말해 마인드 아이덴티티와 관련된 특징들이다.
제품의 질에 대해서도 잘 알려져 있다. 경주용 자동차에 사용될 정도로 내구성과 제동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전 세계에 판매망이 없는 곳이 없다. 미슐랭의 도로지도와 각국의 유명 레스토랑을 소개하는 가이드북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때 선보인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발간되며 권위와 정확성을 인정받고 있다. 이는 여행객들을 위한 서비스 차원에서 시작한 사업이다. 이런 것들이 미슐랭의 행동 아이덴티티를 만들고 있다.
마인드 아이덴티티와 행동 아이덴티티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타이어맨 ‘비벤둠’이다. 1988년 창업자 에두아르 미슐랭과 앙드레 미슐랭의 상상력을 오갤럽이 디자인한 비벤둠은 창업 100주년이던 1998년 더욱 친근하고 넉넉하면서도 현대적 이미지로 일신했다. 1998년을 계기로 미슐랭은 국제적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 앞으로 100년을 사용한다는 각오로 디자인을 했다고 한다. 기업이념과 제품, 서비스 그리고 디자인의 삼위일체가 만들어 내는 기업이미지 메이킹의 모범답안이다.
한성대 교수·미디어디자인콘텐츠학부psyjee@hansu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