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 주요국들이 대부분 참여한 가운데 태국 푸껫에서 열린 16차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 북한에선 박의춘 외무성 부상 대신 박근광 본부대사가 참여했다. 그는 푸껫에 도착하자마자 회의 주최국인 태국의 까싯 피롬야 외교장관을 만나 북한이 펀치백이 되지 않도록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ARF 참가국들의 집중 공세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대북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ARF 참석을 계기로 북한에 대해 “제멋대로인 10대(unruly teenagers)와 같다”고 말했다. 클린턴 장관은 ARF 회의에서 북한의 6자회담 복귀를 촉구한 뒤 “북한이 협상테이블로 돌아오지 않으면 국제적인 고립과 제재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북한과 미국의 태도가 바뀐 이유를 몇 가지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북한으로선 추가 도발 카드가 바닥났거나, 예상외로 강경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기류를 확인했거나, 믿었던 우방인 중국마저 북한을 압박하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시간도 북한 편이 아니다. 과거의 핵 게임은 선거로 정권이 바뀌는 미국과 달리 절대 권력자가 영구 집권하는 북한에 유리했다. 그러나 이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 이상으로 북한에도 ‘3대 세습’이든, 권력자 교체든 내부 문제가 오히려 더 시급한 실정이어서 핵 문제로 시간을 끌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북한 대표단의 상황 인식은 겉으론 과거와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북한 대표단의 일원인 이흥식 외무성 국제기구국장은 23일 셰러턴워커힐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한 뒤 “현재 위기의 근본 원인은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때문”이라고 기존 주장을 되풀이했다.
이번 ARF 회의는 북한의 2차 핵실험 이후 6자회담 참가국은 물론이고 국제사회의 많은 국가들과 마음을 열고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를 발로 차버린 북한은 여전히 외로이 ‘고장 난 레코드’를 트는 것처럼 꽉 막혀 보였다. 고장 난 레코드는 전원을 꺼버리면 그만이지만 북한 레코드는 당장 코드를 뽑아버릴 수도 없어 들을수록 가슴이 답답하기만 하다.
―푸껫에서
김영식 정치부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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