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당론이나 당의 방침이 정해지면 소속 의원들은 꼭두각시처럼 움직인다. 지역구 의원들은 당선된 순간부터 사실상 다음 선거를 의식하며 임기 4년을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공천을 받으려면 당에 대한 충성도를 높여야 하고, 선거에서 이기려면 지역구민들의 눈 밖에 나서는 안 된다. 비례대표 의원들은 당론을 따르지 않았다가 탈당이라도 하게 되면 그날로 배지를 떼야 하니 더욱 약하다.
심지어 김완주 전북도지사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새만금 감사편지’ 한 장 보냈다고 이종걸 의원이 대표인 민주당 민생정치모임이 ‘해당(害黨) 행위’ 운운하며 지사직 사퇴를 요구하는 판이다. 미디어법 처리와 관련해 정치 쇼 같은 의원직 사퇴서 제출은 자제하자거나, 지금 국면에 무슨 가두투쟁이냐는 민주당 일각의 목소리는 당론에 묻혀 들리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의원들에게 국가이익과 양심을 되뇌고, 초당적 협치(協治)를 주문하는 건 헛일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여당 의원으로 살아가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정권을 창출한 정당의 일원으로서 정부의 성공을 적극 도와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입법부 구성원으로서 행정부를 견제하는 위치에도 서야 한다. 몸은 하나인데 어떻게 보면 이율배반적인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니 갈등이 클 만하다. 때론 일 처리가 뒤죽박죽이 되기도 한다. 과거 민주당 정권 때도 그랬고, 지금 한나라당 정권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고민을 덜고자 한나라당 쇄신특별위원회는 나름의 방안을 내놓았다. 당이 청와대에 종속된 모습에서 탈피해 독립성을 가져야 한다거나, 의원들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높이기 위해 강제적 당론을 금지하고 권고적 당론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한나라당 최고위원회는 어제 비공개회의에서 이런 쇄신안을 반영하기 위한 당헌·당규 개정 특위 구성을 승인했다.
그러나 이런 방향에도 문제는 있다. 당과 소속 의원들이 1차적으로 정권의 성공을 위해 협력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지만, 전제가 제대로 지켜질 것이냐는 점이다. 독립성만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여당과 정부, 청와대 간에 허구한 날 치고받다 볼일 다 볼 것이다. 또한 야당이 당론을 철칙처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여당만 달라진다면 스스로 무장해제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명색이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이 당의 부속물처럼 움직이고, 여당 의원의 정체성이 아리송한 모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여야 간 상생(相生) 정치는 기대하기 어렵다. 해법은 먼 곳에 있지 않다. 정당 중심이 아닌, 국회 중심의 정치를 하면 된다. 국회의원이 소속 정당의 대표보다 국회의장의 말을 더 무겁게 받아들이도록 제도와 풍토를 개선해나가야 한다. 국회의원들이여, 자존심을 세워라.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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