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유윤종]이야기가 있는 골목

  • 입력 2009년 8월 5일 02시 56분


영국 런던대 방문연구원으로 풍요한 런던 공연문화의 축복에 휩싸여 지난 1년을 보냈다.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었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도 어느새 친숙한 공간이 되었다.

처음 한두 번 오갈 때였던가, 극장 옆으로 문득 ‘드루리 골목’이라는 곳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피식 웃음이 흘렀다. ‘머핀맨을 아느냐? 드루리 골목에 사는’이라는 옛 동요의 유쾌한 멜로디가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이다. 애니메이션 ‘슈렉’에서 ‘생강빵맨’을 고문하는 장면의 대사가 바로 이 노래의 가사를 딴 것이다. 집에 돌아와 자료를 검색해 보니 “코벤트 가든 인근의 드루리 골목은 노래 ‘머핀맨’의 무대”라는 내용이 나왔다.

런던의 골목골목을 걷다 보면 이처럼 예상하지 못했던 체험을 피할 수 없다. 고색창연한 거리 곳곳이 셜록 홈스, 피터 팬, 해리 포터, 심지어 제임스 본드와 관련된 온갖 상징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기자가 살았던 런던 변두리의 킹스턴 구(區)에는 ‘혹스밀 강’이라는 실개천이 있다. 평소 무심히 지나치곤 했던 곳이지만 어느 날 구청에서 나온 전단을 읽다 반가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19세기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가 이곳을 배경으로 대표작 ‘오필리아’를 그렸다는 것이다. 고등학생 시절, 이 그림이 표지에 들어 있는 차이콥스키의 ‘햄릿 서곡’ LP 음반을 즐겨 듣곤 했다.

휴일을 이용해 상류까지 걸어 보았다. 그림에 나온 것과 똑같은 시냇가와 갈대숲이 펼쳐져 있었다.

런던의 뒷길에서 문학이나 예술과 관련된 장소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970년대 초, 양장점을 열게 된 친지에게 어머니는 “‘카너비’란 이름은 어떠냐”고 제안하셨던 것을 기억한다. 미니스커트의 발상지가 런던의 ‘카너비 거리’라는 것이다. “고객들이 쉽게 기억할 수 있을까”라는 염려 때문에 이 이름이 점포에 붙지는 못했지만 40년 가까이 지나 우연히 접어든 런던의 한 길목에서 ‘카너비 스트리트’란 이름을 발견한 일은 각별한 기쁨을 주었다.

수세기 전에 세계의 경제 문화 중심으로 떠올랐던 영국과 한 세대 만에 급속한 성장을 이룬 한국을 단순 비교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서울 곳곳을 걸으며 골목마다에 숨은 ‘이야기’를 찾기란 쉽지 않다. 재사(才士)와 가인(佳人)들이 600년 넘도록 도성 곳곳을 누비며 온갖 사연을 쌓았지만 옛 관아 자리를 알리는 표지석 정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한때 세계의 ‘변방’에 머물렀던 한국도 언제부터인가 세계를 향한 문화 콘텐츠 발신기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제는 우리의 골목골목에도 이야기를 심을 때가 되지 않았을까. 거리거리를 걷던 명인과 위인과 기인, 전설 속 인물들의 사연을 거리 이름에 담고 표지판으로 알리며 웹 콘텐츠로 담아내는 일은 그다지 많은 예산을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단지 우리를 찾아오는 손님들의 흥미를 돋우자는 뜻만은 아니다. 사연이 담긴 골목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이 사연들에 상상을 보태 자신들만의 이야기로 키워낼 것이다. 이야기가 스스로 가지를 치면서 우리의 거리 곳곳에는 더 많은 이야기가 생겨나고 기록될 것이다. 그중 전 세계로 발산될 콘텐츠도 생겨날 것을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오늘날에도 수많은 새 이야기를 조립해내고 있는 런던의 길목들처럼.

유윤종 문화부 차장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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