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신치영]멋있게 돈쓰는 미국의 부자들

  • 입력 2009년 8월 17일 03시 02분


미국 동부 뉴저지 북부 버겐카운티에 있는 조그만 도시 알파인은 내로라하는 백인 부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다. 자동차를 타고 알파인을 지나면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대저택이 눈에 띈다. 한 대형 제약회사 회장이 살고 있는 저택 대문은 매년 10월 마지막 날인 핼러윈데이 때엔 어김없이 열린다. 전통에 따라 유령이나 마녀 복장을 한 이웃 어린이들이 사탕과 초콜릿을 받으러 오기 때문이다. 이 집에서 언제부턴가 가난한 이웃들에게 돈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소문이 돌면서 어린이와 어른들이 주인의 선행을 기대하며 떼 지어 몰려든다. 집주인은 사람들을 더 불러 모으기라도 하려는 듯 화려한 조명으로 집 주변을 장식해 놨다. 높은 담에다 문을 굳게 잠근 채 경비까지 따로 세우는 한국 부잣집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미국에서 가진 사람들은 베푸는 일을 사회적인 의무로 생각한다. 번 돈을 사회로 돌려주는 일을 당연하게 여긴다.

5월 초 뉴욕 록펠러대 총장관저에는 미국의 대표적 부자들이 경제위기에서 어떻게 기부활동을 할 것인지를 논의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미국 최고 부자를 다투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과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 록펠러 가문의 후손인 데이비드 록펠러 씨 등이 모인 이 회의에는 조지 소로스 소로스펀드매니지먼트 회장도 있었다. 회의를 연 지 10여 일 뒤 소로스 회장은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한 자선모금 행사에 참석해 5000만 달러를 기부했다. 1992년 영국 파운드화를 공격해 영국을 위기에 빠뜨린 소로스 회장을 영국인들은 아직도 ‘세기의 투기꾼’으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미국인은 그를 ‘세기의 자선가’로 부른다. 포브스가 세계에서 29번째 부자로 뽑은 소로스 회장의 재산은 110억 달러다. 그는 그동안 각종 자선기금으로 60억 달러를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부자들이 멋있게 돈을 쓰는 일은 미국 사회의 오랜 전통이다. 뉴욕 시민들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물값을 내지 않았다. 미국의 실업가 존 록펠러가 세운 자선재단인 록펠러재단이 뉴욕시민들의 물값을 대신 내줬기 때문이다. 록펠러가 1937년 사망하면서 남긴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매달 수십 달러씩 물값을 내던 인근 뉴저지 주 사람들은 뉴욕 시민들을 무척 부러워했다.

미국인들의 기부활동은 억만장자들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보통사람들 사이에서도 소액의 기부가 일상화돼 있다. 세계 3대 박물관이자 미국 최대 박물관인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입구에는 요금표가 없다. 관람객들은 박물관 정책에 따라 기부금을 내고 들어간다. 20달러 이상의 기부금을 권고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지만 박물관 직원들은 얼마의 기부금을 내고 입장하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뉴저지 주 뉴어크에 위치한 뉴저지공연예술센터는 매주 목요일 저녁 무료 음악회를 연다. 인근 주민 수천 명이 이런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부자들의 기부금 덕택이다. 예술센터 관계자는 “매년 거액의 기부금을 내는 음악애호가들이 없다면 무료 음악회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진 것을 베풀면서 사는 부자들 때문인지 한국에서 자주 느꼈던 부자에 대한 반감을 미국인들에게선 쉽게 찾아볼 수 없다. 한국에서도 요즘 적극 기부하는 부자가 늘고 있지만 아직도 정당한 세금을 내는 것도 손해 보는 것으로 생각하는 부자가 적지 않다. 부자들이 “자선을 하면 더 큰 행복을 느낄 것”이라는 ‘기부 황제’ 빌 게이츠의 말을 한번쯤 곱씹어 보면 어떨까.

신치영 뉴욕특파원 higgl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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