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70>

  • 입력 2009년 8월 31일 13시 59분


민선은 놀란 눈으로 석범을 쳐다보았다. 석범도 볼테르가 무사시에게 배팅한 사실을 확인한 후 이상하게 여기긴 했다. 그러나 '배틀원 2049'에서 각 경기의 승자를 맞혀 배당금을 받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볼테르가 글라슈트가 아닌 무사시에게 돈을 걸었다고 수사할 수는 없다.

"……그럼 뭘 알고 있냐고 묻는 건가요?"

석범은 즉답 대신 민선의 두 눈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어젯밤 석범은 세렝게티와 보르헤스를 불러 참고인 조사를 했다.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고 문제의 증거영상을 보여주었다. 두 연구원의 얼굴에 놀라움과 두려움이 가득 찼다. 그리고 글라슈트에 관한 일이라면, 최 볼테르 교수가 독단적으로 결정하기 때문에 연구원인 자신들도 모르는 사항이 많다고 주장했다.

"똑똑히 잘 봐."

석범이 스마트폰을 꺼내 허공에 열 십 자를 그었다. 푸른 화면이 민선을 압도하듯 펼쳐졌다.

처음 보는 실험실 중앙 수술대 위에 글라슈트가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다. 흰 방역복을 입고 마스크와 안경을 쓴 세 사람이 글라슈트의 머리 주위에 둘러섰다. 잠시 뒤 한 사내가 더 들어왔다. 그는 안경을 벗고 마스크를 윗입술이 보일 만큼만 내렸다. 은석범이다. 석범이 화면을 쳐다보며 말했다.

"서울로봇과학연구소 3-1호에서 글라슈트의 이상행동에 대한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해체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해체작업을 맡은 책임자는 로봇공학자 겸 의사인 스미스 박사이고, 어시스턴트는 재활 로보틱스 전문가 창 박사와 전은영 박사입니다. 보안청 특수대의 참관 검사로서, 어떤 조작이나 개입도 없음을 보증합니다. 자,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스미스 박사는 디지털 고글을 쓰고 고어텍스 장갑을 낀 후 글라슈트 앞에 서서 석범에게 눈신호를 보냈다. 석범이 뒷목 안쪽에 있는 알루미늄-티타늄 III 덮개를 젖혀 버튼을 누르자, 글라슈트의 가슴 덮개가 열리면서 내부가 드러났다. 스미스 박사는 글라슈트의 왼쪽 가슴 안쪽에 있는 중앙제어시스템 유닛을 꺼내고, 죽음신호를 내는 SDT 3500 칩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글라슈트는 '배틀원 2049' 기간 동안 단 한 차례도 SDT 3500 칩이 죽음신호를 발생시키지 않은 유일한 로봇이다.

그리고 골반에 있는 사호란 모터 9000 두 개를 분해해 두 다리를 몸체로부터 분리했다. 초강력 사보이 모터를 어깨에서 꺼내자 두 팔도 몸체로부터 분리됐다. 창 박사와 전은영 박사는 중앙제어시스템과 중앙정보처리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매뉴얼에 나온 대로 검사했다.

"글라슈트의 '중앙제어시스템'은 정상입니다. 사호란 모터 9000을 컨트롤하는 회로가 손상되었지만, 제어에 큰 문제는 없었을 겁니다."

스미스 박사의 손길이 글라슈트의 머리로 향했다. 창 박사와 전은영 박사가 좌우에서 글라슈트의 목을 잡고 고정시켰다. 스미스 박사가 로봇의 안면 부위에 오토 드릴과 스마트 드라이버를 장착하자, 글라슈트의 머리가 자동 분해되기 시작했다. 창 박사와 전은영 박사는 안면 부위에서 나온 부품들을 하나하나 옆 테이블에 늘어놓았다.

스미스 박사의 양손이 뺨과 눈과 이마를 지나 정수리까지 올라왔다. 드릴이 둥글게 반원을 긋고 드라이버가 돌아가며 철판을 제거하자, 참외보다 조금 더 큰 '길쭉한 강철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양끝으로 연결된 칩이 길게 흘러내렸다. 창 박사가 글라슈트의 설계도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은영 박사와 스미스 박사 역시 어깨를 으쓱거리며 강철구를 손가락질했다. 그리고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석범에게 향했다. 석범이 결정을 내렸다.

"설계도에 없는 강철구를 발견했습니다. 지금부터 이것을 분해하겠습니다."

창 박사와 전은영 박사가 먼저 내용물을 안전하게 확인하기 위해 둥근 천을 깔았다. 스미스 박사가 양쪽으로 흘러나온 칩을 따라 오토 드릴을 수동으로 전환시켜 돌리기 시작했다. 강철구를 반으로 가른 다음, 창 박사가 조심스럽게 합성 고무비닐에 덮인 내용물을 양손으로 감싸 꺼냈다.

그것은 사람의 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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