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김견숙]아홉살, 우리반 아이들의 회장선거

  • 입력 2009년 9월 5일 02시 51분


“선생님, 제가요. 만약에 회장 부회장 하면요. 엄마가 많이많이 학교에 오셔야 돼요?”

학급 임원선거가 있는 날 아침, 내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지호가 얼른 달려와 묻는다. 내가 오기만을 기다린 모양이다.

“아니, 지호가 회장 부회장이 되는데, 왜 엄마가 와야 해?”

“엄마가요. 저는 하고 싶은데, 엄마가 일을 하시니까 선거에 나가지 말래요. 그런 거 하면 학교에 많이 와야 하는데, 엄마는 못 그러신대요.”

말을 잇는 지호의 표정이 자못 심각하다. 요즘 학급 임원 어머니 중 맞벌이 어머니는 그렇게 부담이 된다던데 아마 지호 어머니도 그런 생각이 들어서였겠다. 소문에는 교실청소나 학부모 모임 같은 데 나가주는 엄마 대행을 구하는 엄마들이 있다던데 요즘 엄마는 여간 힘든 게 아닌 것 같다. 회장 부회장이 반에 봉사하는 거지 엄마가 봉사하는 게 아니니까, 잘 생각해보라며 등을 두드려 주었지만 엄마들이 참석해야 하는 여러 가지 연수회나 행사들을 생각해 보니 나도 괜스레 미안해졌다.

선거시간. 마른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교실은 긴장 그 자체다. 학급 임원이라는 것이 아이 모두가 욕심내는 ‘높은 자리’다 보니 며칠 전부터 친구들이 좋아할 장난감을 들고 와서 한 번 만져 보라고 선심작전을 펴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내게 와서 일부러 큰 소리로 “선생님, 저 꼭 이번에 회장 할 거예요! 진짜로요!” 하고 공언작전을 펴면서 아이들에게 ‘나는 선생님께 다 말해 놓았다’는 효과를 노리는 아이가 있는 등 아홉 살 입후보자들의 팽팽한 유세활동과 물밑작업이 있었다.

신종플루 막게 매일 청소 ‘공약’

회장이 되면 좋겠다는 친구가 있으면 추천하라는 내 말에 유정이가 “저는 선형이를 추천합니다. 선형이는 전에 종만이가 아플 때 가방 드는 것, 급식 받는 것을 도와준 것을 보면 선형이가 회장이 되면 우리 반을 많이 위할 것 같습니다”라며 또박또박 말한다. 선형이는 지난여름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 전체에 깁스를 하고 학교를 다녔던 종만이의 짝인데, 내가 보아도 대단하다 싶을 정도로 불편한 짝을 살뜰히 도와주었다. 그 모습이 아이들에게도 대단하게 보였나 보다. 선형이의 이름이 불리자마자 입후보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부러운 눈길이 쏟아진다. 다른 추천자가 없어 자칫하면 선형이가 무투표로 당선될 판이다.

“혹시 자신이 해보고 싶다는 친구는 없나요?”

내 말이 떨어지자 눈치만 보던 아이들이 손을 들기 시작한다. 칠판에 금세 여덟 명의 후보자 이름이 적혔다. 서른넷의 유권자 중에 후보자가 여덟인 선거다.

후보자들의 약속을 듣는 시간. 듣는 아이들의 표정이 진지하다. 반의 모범이 되겠다는 다소 진부한 공약부터 친구들끼리 절대로 싸우는 일이 없게 만들겠다느니, 공부를 잘하는 반으로 만들겠다는 등 각양각색의 약속이 쏟아진다. 그러다가는 “제가 만약 회장이 된다면 친구들이 신종 플루에 걸려서 아프지 않도록 매일 깨끗하게 청소를 하겠습니다”라는 민우의 공약에 듣고 있던 내가 풋 하고 큰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신종 플루에 걸리지 않게 해 준다는 공약이라니. 시사성이 대단히 강한, 깜찍한 공약이지 않은가? 아이들은 웃기는커녕 고갯짓도 해 가며 듣는다.

드디어 투표용지가 나누어지고 “도장 있는 쪽으로 써야 돼요?” “표는 몇 번 접어요?” “긴 쪽으로 접어요?” 등 온갖 질문이 쏟아진다. 그 와중에 “선생님, 내가 내 이름 쓰면 안 되지요?” 선거 전 수시로 내게 공언작전을 펼쳤던 현창이가 머쓱해하면서 묻는 게 자기를 뽑으려는가 보다.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자기 이름이든 다른 친구 이름이든 후보자 중에서 꼭 회장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이름을 쓰세요”라고 말해주었다.

개표위원은 지난 학기 때 수고해준 1학기 회장 부회장이다. 한자 시간에 배운 ‘正’자를 이용해서 득표수를 표시하라고 하니 그 역할을 맡은 남자 부회장이 손바닥에 몇 번이고 연습을 한다. 드디어 개표가 시작되고 전 회장이 표를 크게 읽고는 옆에 있는 여자 부회장에게 표를 넘겨준다. 여자 부회장은 표를 확인한다. 이름이 불릴 때마다 탄성이 터져 나온다. 개표 결과는 역시 선형이가 회장으로 당선. 자기 표 한 표만 나온 후보자도 두어 명 보여 슬며시 웃음이 났다. 아홉 살 어린 친구들의 선거에서는 나만 나를 뽑았다는 사실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

“제가 제 이름 쓰면 안되나요”

회장을 뽑는 데 40분이 훌쩍 지나버렸다. 후보자가 원체 많다 보니 부회장도 뽑아야 했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다. 다음 시간에 부회장을 뽑자는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회장이 된 선형이 주위에 아이들이 빙 둘러서서 난리가 났다. 살짝 들어보니 이제 같이 놀자는 아이들도 한둘이 아니다. ‘이런 것이 어린 친구들의 권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와중에 내게 뛰어와서는 “선생님 저, 그런데, 다음 시간에는 부회장 꼭 될 거예요!” 친구들 들으란 듯이 크게 소리치는 현창이의 말에 나는 더 크게 웃지 않을 수 없다.

김견숙 대구매곡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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