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름이(가명·12)는 매일 2번씩 이런 신통한 약을 먹는다. 이 약을 먹으면 금세 몸집이 커지고 공부를 더 잘하게 될 거라 믿는다.
푸름이는 또래보다 체격이 작다. 그렇다고 덩치 큰 친구들에게 주눅 드는 법은 없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태권도를 배워 '골목대장'이라 불릴 정도로 활달하다. 친구들을 집으로 몰고 와 유치원 놀이를 할 때는 영락없는 소녀다.
푸름이의 엄마 김모 씨(38)는 지갑 속 딸 사진을 내보이며 아이 자랑에 침이 마른다. 그러나 얼굴 가득 핀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옥은 죽어서 가는 데가 아닌 것 같아요."
▲동아일보 특별취재팀
푸름이는 태어날 때부터 약했다. 모유를 먹일 때는 괜찮더니 분유를 먹이면 어김없이 게워 냈다. 입안이 패일 정도로 염증도 심했다.
1999년 초 김 씨의 조카가 소아암 판정을 받았다. 덜컥 겁이 난 김 씨는 돌이 갓 지난 푸름이를 데리고 큰 병원을 찾았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엄마 아빠도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푸름이는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보균자로 판정받았다. 바로 에이즈 환자다. 김 씨도, 김 씨의 남편(39)도 에이즈 양성 판정을 받았다. 그때 김 씨의 뱃속에는 4개월 된 아이가 있었다. 부인은 남편을, 남편은 부인을 의심했다. 방에 틀어박혀 울기만 하는 김 씨에게 남편은 다 같이 죽자고 했다.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는 김 씨.
"에이즈는 암이나 백혈병처럼 위로받을 수 있는 질병이 아니잖아요."
엄마가 의사의 처방에 따르기만 하면 태아에게 에이즈의 원인균인 HIV를 옮길 확률은 5% 미만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김 씨는 자신이 에이즈에 걸린 사실을 알기 전까지 푸름이에게 애지중지 젖을 먹였다.
수유를 하면 엄마가 아이에게 에이즈 균을 옮기는 '수직감염' 확률이 20~30%로 높아진다. 올해 6월 기준으로 국내 수직감염환자는 푸름이를 포함해 모두 6명. 국내 생존 에이즈 환자 5497명 중 0.1%는 태어나면서부터 아토피처럼 에이즈를 앓았다.
이들에겐 병원조차 위안의 공간이 되지 못한다. 잔병치레가 잦은 푸름이가 입원실을 벗어나 복도라도 돌아다니면 대번에 간호사의 질책이 이어진다.
푸름이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저 아프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뿐이다. 써서 어른도 먹기 힘든 약들을 보약처럼 열심히 먹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동아일보 특별취재팀
그런 푸름이가 김 씨에겐 희망이다. 처음 발병 사실을 알고 하염없이 울던 김 씨에게 엉금엉금 기어와 휴지를 건네던 푸름이가 지금은 자기가 공부를 열심히 안 해 엄마가 약을 먹는 줄 알고 마음 아파한다. 다행히 둘째가 감염되지 않은 것도 김 씨를 일으켜 세운다.
김 씨 가족의 주치의는 "발병 초기에는 부부가 진료실에서조차 싸움이 잦았는데 요즘은 독감예방주사도 서로 먼저 맞으라고 할 정도로 부부 금슬이 좋다"며 웃는다.
하지만 김 씨는 알고 있다. 푸름이에게 언젠가는 감염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것을.
"'그날'이 분명 오겠죠. 큰 진통을 겪을 거예요. 무섭고 겁나요."
김 씨는 소원은 늘 하나다. 푸름이가 자신의 감염 사실을 알기 전에 에이즈 완치약이 개발되는 것. 김 씨 가족의 가훈은 그래서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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