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현정의 고현정에 의한 고현정을 위한, 드라마 '선덕여왕' * 20년 연기 인생의 신기원이자 꼭짓점 '미실' * 20대엔 <모래시계> 30대엔 <선덕여왕>으로 신화(神話)가 되다. * 우리는 또 한번 그의 신들림을 경험할 수 있을까?
이 '여자' 무섭다.
데뷔한 지 올해로 꼬박 20년째다. '모래시계'라는 불멸의 히트작을 갖고 있다. '중견배우'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화면에 비치는 그녀의 모습은 화사함을 뛰어넘어 강렬한 포스와 후광으로 넘실댄다. 그런데 배우 이력 가운데 공백 기간이 절반에 가까운 10여 년에 이른다. 그것도 한국 연예시장이 급성장하기 시작한 1996년부터 2004년까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살았다.
한국 사회에서 최고의 영예 중 하나인 '삼성가(家) 며느리'를 마다하고 연예계로의 귀환을 결행한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행보였다. 그러나 복귀를 결심한 순간 너무도 우아하고 자연스럽게 정상의 자리를 탈환했다. 이런 사람을 놓고 '천성이 배우'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배우'란 직업에 대한 모독일지도 모르겠다.
▶고현정의 고현정에 의한 고현정을 위한, 드라마 '선덕여왕'
배우 '고현정'을 설명하는 수식어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2009년 그녀에 필요한 단 하나의 수식어라면 다름 아닌 '미실'이다(혹자는 아예 '고미실' '국민새주'라 부른다).
올해 최고의 드라마로 MBC '선덕여왕'을 꼽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작품이었다. 통상 한 작품이 히트를 기록하면 주인공이 부각되고 차례로 작가와 PD, 제작사가 조명을 받는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기존의 모든 질서를 거부하고 단 한사람에 의한 드라마로 규정될 수도 있다.
이 드라마를 움직인 원동력은 신라 성골 출신들의 고귀함도, 망국의 한을 품은 가야 출신 김유신도, 젊은 화랑들의 패기도 아니었다. 천하디 천한 비극적 여인, 아니 고현정을 통해 뿜어내는 역사 속 패배자의 한 맺힌 절규였다.
"지킬 수 없는 날엔 후퇴하면 되고, 후퇴할 수 없는 날엔 항복하면 되고, 항복할 수 없는 날, 그날 죽으면 그만이다"
11월 10일 미실이 죽기 전에 남긴 마지막 일성은 역설적이게도 "자칫 실패하더라도 도전을 멈추지 말자"는 희망의 메시지로 전달되는 위력을 발휘했다.
1400년 전 역사 속 주변인이던 미실은 그렇게 고현정의 몸을 빌려 이 땅에 환생했다.
단순한 재림이 아니었다. 62부작 '선덕여왕'의 실질적인 주인공 미실은 이 한 작품으로 진흥왕과 김춘추의 '신라'를 미천한 여성 '미실'의 신라로 뒤바꿔 놓았다. 정통 사학자라면 펄쩍 뛸 일대 사건이지만 선덕여왕의 전개를 꼼꼼하게 지켜본 시청자들이라면 당초 표독했던 악녀 미실에 마치 '빙의'된 듯 연기하는 고현정의 활약에 빠져들어 그녀의 패배를 비극적 영웅의 좌절로 받아들였다.
통상 드라마의 착한 주인공이 아닌 악녀에 가까운 '팜 파탈'이 실질적으로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나아가 방송을 넘어 '사회적 현상'까지 불러일으킨 미실 붐은 한국방송사상 최초의 일이자, 고현정이란 존재 없이는 불가능했을 법한 일대 사건으로 평가 받는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미실은 반 년 가까이 시청자와 국민들에게 역사의 냉엄함과 정치의 본령에 대한 명확한 메시지까지 전달한 셈이다. 결국 그녀는 단순하게 한 편의 드라마에 출연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셈이 됐고, '고미실'이라는 존재로 한 동안 우리 곁에서 살아갈 불멸의 캐릭터를 확립한 셈이다.
▶ 2009년 O2 최드연, 이견 없는 1위
"사극 연기도 스타일리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하지만 한결같이 진한 맛의 연기가 때론 부담스럽기도."(스포츠동아 김재범 엔터테인먼트부장)
"빙의란 이런 것이다!"(충남대 윤석진 국문과 교수)
"그녀가 연기한 미실은 다른 대안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악역이면서 입체적인 성격을 지닌 연기는 해외 시청자에게도 어필할 수 있을 정도로 인상적"(윤석호 PD)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동아일보 O2편집팀과 누리꾼, 그리고 평단이 함께 선정한 2009년 '최고의 연기자'는 MBC '선덕여왕'의 미실(고현정 분)에게 돌아갔다.
1차 예심에서 이병헌(13명 추천)과 함께 선두권(12명 추천)을 이룬 고현정은 2차 네티즌 투표와 3차 전문가 심사에서 이병헌을 간발의 차이(0.8점)로 제치고 올해 최고의 연기자로 등극했다. # 심사 점수표
고현정이 연기한 미실의 위력은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입증됐다.
여론조사 기관 갤럽이 만 13세 이상 남녀 1726명을 대상으로 '올 한해 가장 뛰어난 활약을 한 탤런트'를 물은 결과 고현정이 34.8%의 지지를 받아 1위를 차지했다.(2위는 이병헌 20.5%, 3위는 김태희 16.3%) 게다가 62회 중 절반 이상이 시청률 40%를 달렸던 '선덕여왕'은 삼성경제연구소가 선정한 올해의 히트상품 6위에까지 올랐다.
▶ 고현정의 미실은 왜 폭발했을까?
고현정이 연기한 미실은 권력을 향한 야망과 책모가 매우 뛰어난 인물로 전형적인 악녀(惡女) 캐릭터에 가깝다.
때문에 '미실'이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온 것은 의도했으면서도 의도하지 않은 결과다. 드라마를 구상한 김영현, 박상연 콤비 작가마저도 "우리들도 감탄하면서 지켜봤다"고 말할 정도로 미실은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드라마 전체를 좌지우지 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대략 3가지로 압축된다.
① 고현정의 탁월한 아름다움
시청자들은 '선덕여왕'을 보는 동안 화면을 가득 채운 미실의 패션과 표정 하나하나에 눈동자를 고정시켰다. 그녀의 표정연기는 극의 흐름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정교했고 심지어 미실은 최후의 순간에도 가장 아름다운 자태로 죽음을 맞이했다.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악녀의 최후가 있었던가.
당초 고현정은 '사극'에는 어울리지 않는 배우로 평가 받았다. 언제나 눈부시게 아름다우면서도 능청맞은 현대여성을 연기해온 그녀에게 '미실'역은 꽤 부담스러운 도전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30대 후반에 이른 고현정에게 사극 장르는 결코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극 특유의 인물 중심적인 카메라 포커싱은 이제는 적당히 세월의 세례를 받은 그의 뽀얗고 동글동글한 얼굴을 더욱 아름답게 비쳤다. 그렇게 미실의 표정은 화면을 가득 채운 동안 보는 이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②역사 속 패배자에 대한 동정
올 한해 우리 사회를 휩쓴 '루저(Loser)'란 그리 아름다운 표현이 아니다. 드라마 속에서도 신라 성골들은 미실을 향해 "역사 속에 네 이름이 절대 등장하지 않도록 만들겠다"고 저주를 아끼지 않았다. 그 저주대로 미실은 패배자가 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미실은 드라마에서는 권력자로 묘사됐지만 역사에서는 한없이 초라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고현정이 연기한 미실은 야망과 능력을 모두 겸비한 특별한 존재였다. 그녀에게 단 한 가지 없는 것은 현대인들 역시 공감할 수 없는 '출신 성분' 그것 하나였다.
그러나 결코 권력자 그 자신은 될 수 없었던 그녀는 끝없이 야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그려졌다. 야망이 있어도 능력이 없다거나, 그 반대거나 하지 않고, 야망과 능력을 다 같이 가지고 있으되 출신 때문에 넘을 수 없는 벽에 끝없이 부딪쳐야 할 운명. 이는 대다수의 시청자들에게 한 혁명가의 죽음으로 받아들여도 좋은 만큼 강력한 임팩트와 동질성을 안겨줬다.
③ 고현정이 가진 독특한 개인 이력
배우의 연기는 작품 속 캐릭터와 전혀 무관할 수 없는 법이다. 아무리 어린 배우라고 해도 배우들은 자신들의 육감을 동원해 그 캐릭터와 자신을 최대한 일키시켜 나간다. 그것이 바로 연기고, 배우의 존재 이유다. 이제는 별달리 특이할 것도 없는 '스타니슬라프스키' 연기이론은 배우들이 극중 캐릭터를 이해하고 자신의 경험을 떠올려 연기하라고 주문한다.
고현정 없는 미실이 불가능한 이유는 대중들이 가진 고현정에 대한 미묘한 감정 때문일지 모른다. 평범한 미스코리아 도전자에서 시작해 삼성가 며느리를 거쳐 다시 평범한 연기자로 돌아온 그녀의 인생 이력만큼 드라마 속 '미실'과 닮아 있는 배우가 또 있을까?
따지고 보면 그는 결혼으로 사라져 버린 뒤에도 단 한순간도 국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적이 없었다. 그것을 과연 공백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녀의 결혼식, 혹은 선글라스를 끼고 비밀리에 요리학원에 다닌 것도, 혹은 삼성가 가족 모임이 열릴 때도 세간의 관심은 오로지 고현정에게만 집중됐다. 그녀에게 인생사의 모든 활동은 배우 훈련의 연장선이 됐을지 모른다. 그리고 2003년 이혼이라는 비극적 스포트라이트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돌아온 것 역시도 그다웠다. 결국 그의 개인사로 인해 캐릭터의 리얼리티를 극대화시킨 셈이 됐다.
▶우리는 또 한번 그의 신들림을 경험할 수 있을까?
30살 이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모래시계'의 혜린.
갓 20세 여성의 연기라고 하기에 그녀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대한민국의 혼란기를 차가운 눈빛과 뜨거운 가슴으로 연기했다. 그리고 17년이 지난 2009년 '선덕여왕'의 미실로 '국민새주'라는 영예까지 얻었다.
사실 10여 년 전 그녀는 한국 남성들의 판타지의 중심이었다. 대한민국 공인 최고 미인이라 할 미스코리아 출신으로 많은 여성들의 '신데렐라 콤플렉스'까지 충족시키고 무대를 떠났던 그녀는 이제 20대와 30대에 연기한 단 두 작품으로 신화가 된 배우가 됐다.
그녀의 다음 행보는 어디로 향할까. 이미 영화계에서는 까칠하기로 유명한 홍상수 감독 영화에 두 번이나 출연을 했다. 드라마, CF, 영화 거칠 것 없는 종횡무진 활약이 기대된다.
인터뷰 때마다 고현정이 즐겨 쓰는 표현이 있다.
"비 오는 날 비 안 맞으려면 나오지 말아야지…"
그녀가 가진 배우로서의 자세를 엿볼 수 있는 표현이면서도,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도전을 멈추는 않는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그리고 우리는 그녀의 도전이 끝나지 않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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