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발 묶인 이방인 하멜, 조선을 알리다
억류기간 월급 청구하려 쓴 보고서
‘하멜 표류기’로 출간… 유럽서 인기
조선문화 우수성에 눈뜬 네덜란드
교역 시도했지만 日 방해로 무산
《길에는 흔적이 있다. 교류와 전파의 흔적. 길에는 만남이 있다. 교류와 전파는 낯선 것과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그 만남은 늘 새로운 사상과 예술, 문화를 탄생시켜 왔다. 한국의 문화사를 바꿔 놓은 길의 흔적을 되짚어보고 그것의 현재 의미를 들여다보는 신년기획 ‘길, 역사를 따라 문화를 따라’를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로마에서 경주까지 고대 동서 문물교류사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유리(琉璃)의 길, 임진왜란 때 조국을 떠나 이국땅을 떠돌다 20세기 초 조국으로 돌아온 삼국유사의 길, 시련을 딛고 위대한 예술과 사상을 낳았던 19세기 추사 김정희와 다산 정약용의 유배의 길…. 다양한 길의 흔적을 통해 한국 문화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되돌아본다.》전남 강진군 병영면의 ‘전라병영성 하멜기념관’. 병영성(兵營城)을 배경으로 한 손을 들고 먼 곳을 가리키고 있는 모습의 인물상이 하나 서 있다. 네덜란드 호린험 시가 기증한 헨드릭 하멜(1630∼1692)의 동상이다.
하멜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직원으로 1653년 무역선 스페르베르호를 타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거쳐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항해하던 중 풍랑을 만나 조선에 표착했던 인물이다. 350여 년이 지난 요즘, 네덜란드는 거스 히딩크 전 한국 축구대표 감독 덕분에 더욱 친숙해졌다.
강진군은 하멜의 고향인 네덜란드 호린험 시와 1998년 자매결연해 교류하고 있다. 호린험 시는 하멜 동상을 비롯해 스페르베르호에 장착했던 대포 복제품과 다양한 유물 등을 하멜기념관에 기증했다.
○ 우연한 표착, 낯선 시선
“올해도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었구나. 강진에서만 벌써 7년째.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것일까. 나의 고향 호린험 시는 어떻게 변했을까. 아, 더는 견딜 수가 없어….”
1662년 가을 어느 날, 지금의 강진군 병영면 병영성. 노역으로 고된 하루를 보낸 하멜은 집 앞에 있는 수령 500년의 은행나무 아래 고인돌에 앉아 향수에 젖었다. 9년 전 여름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1653년 8월 16일. 대만을 지나 나가사키로 향하던 스페르베르호는 갑작스럽게 태풍을 만났다. 하멜 일행은 천신만고 끝에 제주 해안에 표착했다. 선원 64명 가운데 36명만 살아남았다.
표착지는 지금의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바닷가로 추정된다. 지난달 말 고산리 해변을 찾았을 때 인적은 드물고 눈발과 함께 거센 파도만 밀려왔다. 동행했던 김오순 제주문화예술재단 연구사는 “고산리가 가장 유력한 표착지”라며 “저 파도에 밀려 하멜 일행이 여기까지 떠밀려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멜 일행은 제주의 제주읍성으로 옮겨졌고 1653년 10월 조정에서는 벨테브레(박연)를 내려 보냈다. 26년 전인 1627년 동인도회사의 범선을 타고 일본으로 향하던 중 물을 얻기 위해 해안에 상륙했다 주민들에 붙잡혔던 네덜란드 출신의 박연. 그는 당시 효종의 북벌정책에 따라 훈련도감에서 무기 개발의 중책을 맡고 있었다. 박연과의 만남은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그(박연)는 우리를 많이 위로해 주면서 우리가 국왕을 만나게 된다 해도 다른 것(귀환)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라고 말했다. 통역을 만난 기쁨은 거의 슬픔으로 바뀌고 말았다.”
하멜 일행은 1654년 6월 서울로 이송돼 훈련도감에서 병사로 생활했다. 이들은 낯선 생김새 때문에 늘 놀림을 당했다, 지체 높은 고관들의 집에 불려가 구경거리가 됐다. 이들의 본국 송환, 일본 송환 요구는 거절당했다. 탈출을 시도하다 실패하기도 했고 결국 1656년 3월 강진군 병영면으로 유배됐다.
○ 깊어지는 향수, 극적인 탈출
강진에서 하멜 일행의 생활은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매일 병영성 광장과 장터의 풀을 뽑고 청소를 했다. 수년째 흉년이 계속돼 음식을 구걸하러 나서는 경우도 많았다.
강진 병영은 하멜의 13년 조선생활 가운데 가장 오래 지낸 곳. 병영 곳곳엔 하멜의 흔적이 남아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황토와 돌을 이용해 쌓은 빗살무늬 담장이다. 하멜 일행이 쌓은 것으로 전해오고 있어 하멜식 담장이라 부른다. 하멜 일행이 조성한 병영천의 관개수로도 이색적이다. 본류 옆에는 좁은 지류가 하나 삐져나와 있다. 강진군청의 김종식 씨는 “이곳에서 빨래를 하게 함으로써 본류의 물이 오염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담장과 물길이다.
하멜 일행은 1663년 3월 전북 남원, 전남 순천 여수로 분산됐다, 여수에 온 하멜은 전라좌수영 영내에서 여전히 노역생활을 하면서 먹을 것이 부족해 식량을 구걸했다. 점점 지쳐가던 하멜 일행은 탈출 계획을 세웠다. 8명은 은밀한 준비 끝에 배 한 척을 구해 어두운 밤 탈출에 성공했다. 1666년 9월 5일. 조선에 표착한 지 13년 만이었다.
하멜 일행은 나가사키 현 고토(五島) 섬의 나마(奈摩)에 도착했다. 하멜은 당시 이국선 처리 규정에 따라 고토의 행정중심지인 후쿠에(福江)봉행소로 보내진 뒤 다시 나가사키로 이송됐다. 하멜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있던 데지마(出島)에서 네덜란드로 돌아갈 때까지 2년간 머무르다 1667년 12월 일본의 출항 허가를 얻어냈다.
○ 유럽이 코레아와 교역을 시도
166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1653년 바타비아발 일본행 스페르베르호의 불행한 항해일지’라는 책이 출간됐다. 그해와 이듬해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의 다른 출판사에서 같은 책이 잇달아 출판됐다. 이어 1670년엔 프랑스어판이, 1671년엔 독일어판이, 1704년엔 영어판이 각각 프랑스 독일 영국에서 출간됐고 19세기까지 판을 거듭했다. 한국에서 ‘하멜 표류기’로 알려진 그 책이다. 이 표류기는 하멜이 조선에서 13년 억류기간의 월급을 청구하기 위해 나가사키에서 작성한 보고서다.
하멜의 표류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 코레아를 서양에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계기가 됐다. 하멜 일행이 네덜란드로 귀환하자 동인도회사는 조선과의 직접 교역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조선에서 면포 마포 인삼 호피 등을 가져다 큰 이익을 얻고 있다는 보고 때문이었다. 17세기 말∼18세기 초 ‘하멜 보고서’의 선풍적인 인기도 조선에 대한 서양의 관심을 반영한 것이었다.
네덜란드는 조선과의 무역을 위해 1669년 1000t급의 코레아호를 건조했다. 그러나 조선과의 무역을 독점하려는 일본 막부의 방해로 코레아호는 한 번도 조선으로 항해하지 못했다.
조선 자기의 우수함을 알리는 간접적인 계기도 됐다. 17, 18세기 동인도회사는 일본과 중국의 청화백자를 수입해갔다. 당시 일본의 청화백자는 나가사키에서 멀지 않은 규슈(九州)의 아리타(有田)에서 만든 것이었다. 그곳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 이삼평이 청화백자 등의 자기를 일본에서 처음 만들었던 곳이다. 하멜의 조선 표류 소식이 알려지면서 이삼평 자기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그 덕분에 동인도회사를 통해 더욱 적극적으로 유럽에 전파된 것이다.
지난해 12월 말 나가사키역사문화박물관에서는 이곳에 진출했던 네덜란드 상인과 일본의 관계를 조명하는 ‘일본과 네덜란드’전이 열렸다. 동인도회사의 약자인 ‘V.O.C.’ 표지가 그려진 청화백자, 데지마에서 출토된 일본, 대만, 네덜란드 벽돌 등을 통해 당대 교류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박물관의 오카모토 겐이치로(岡本健一郞) 연구원은 “네덜란드와 일본의 교역은 17세기 말까지 가장 활발하게 이뤄졌는데 이는 하멜이 표류한 시기와도 일치한다”고 말했다. ○ 하멜과의 또 다른 만남을 위하여
지난해 12월 말 강진 병영을 찾았을 때 강진군청 김종식 씨는 “당시 하멜 일행은 한국인 부인을 얻고 자녀를 낳기도 했다. 그 후손 몇 명이 살고 있다”고 했다. 병영 남씨다. 그러나 그들을 만나지는 못했다. 김 씨는 “그동안 한국에서 네덜란드인 후손으로 살아오면서 이국적인 외모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래서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피한다”고 전했다.
강원대 인문과학연구소의 신동규 교수는 “하멜의 표류는 17세기 조선과 일본 네덜란드의 국제관계사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며 “하멜에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조선인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하멜기념관 입구엔 이렇게 써 있다.
‘1653년 8월 어느 날, 이국만리 낯선 조선땅. 뜻하지 않은 파고를 만나 유명을 달리한 이름모를 스페르베르호 선원 48명의 넋을 위로하며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무사히 귀향한 선원 16인의 조선에서의 삶을 기립니다.’
강진·제주·여수=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나가사키=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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