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역사를 따라 문화를 따라]<2>원행의 길-조선 후기 최고의 정치문화 이벤트

  • Array
  • 입력 2010년 1월 6일 03시 00분


코멘트

正祖, 효행의 길서 民의 소리를 듣다

창덕궁서 화성 현륭원까지
아버지 사도세자릉 찾아
재위 24년간 13회 이상 참배
원행길 1100여건 民願처리
“백성과 소통 세계적 모범 사례”

《1795년(을묘년) 음력 윤2월 9일 묘시(오전 5∼7시), 정조와 신하, 악대, 나인, 군졸 등 6000여 명과 말 780필로 이뤄진 행렬이 창덕궁 돈화문을 나섰다. 행렬은 파자전 돌다리(현 서울 종로구 단성사 앞), 숭례문, 청파교(현 서울 용산구 갈월동 쌍굴다리 부근)를 거쳐 한강에 도착했다. 한강에는 이미 11일 동안 공사해 배다리(배를 연결해 만든 교량)를 놓았다. 선두인 경기감사(京畿監司) 서유방이 다리에 들어섰고 우의정 채제공이 뒤를 잇고, 별기대(別騎隊) 84명이 북을 두드리며 따랐다. 주작, 현무, 백호, 청룡을 그린 형형색색의 깃발들이 강바람에 세차게 나부꼈다. 다리가 출렁이자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두 누이 청연, 청선 군주(郡主·왕세자의 정실에서 태어난 딸)가 탄 가마가 심하게 흔들렸다.》
한강 폭은 330∼340m. 다리를 놓는 데 36척의 배가 쓰였다. 다리는 모양과 실용성을 고려해 가운데는 높게, 양쪽 끝으로 갈수록 낮게 만들었다. 다리의 양편에는 1파(把·180cm)마다 난간을 설치하고 바닥에는 잔디를 깔았다. 배다리는 5년 전 정조가 직접 쓴 책인 ‘주교지남(舟橋指南)’의 내용대로 만들었다. 배 12척의 호위까지 받으며 정조 일행은 무사히 한강을 건넜다. 정조의 을묘년 원행(園幸·후궁이나 세자의 묘를 방문하는 것)의 하이라이트인 한강 도하를 마무리하는 순간이었다. 정조의 실용과 과학정신의 산물인 배다리를 널리 알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 아버지에게 가는 길

한영우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정조의 원행은 효를 실천하는 군주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백성들의 충성심을 끌어내 통치기반을 강화한 거대한 정치문화 드라마”라고 평가한다. 한 교수는 “정조는 원행과 세계 최고 수준의 신도시인 화성 축조를 통해 양반국가가 아닌 민국(民國)의 건설을 꿈꿨다”며 “특권사회를 극복하고 보통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정조의 꿈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함의가 있다”고 말했다.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를 이끈 임금 정조. 정조는 규장각을 세워 학문의 진흥과 인재 양성에 힘쓰고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받아 왕권을 강화했다. 실학을 토대로 경제를 발전시키고 국방력을 키우는 데도 힘썼다.

민본주의를 신봉한 정조는 백성들과 소통했다. 24년 재위 기간 중 60회 이상의 능행(陵幸·왕과 왕비의 무덤을 찾는 것)과 원행을 통해 백성들의 민원을 접수했다. 정조는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에서 화산(華山·현 경기 화성시 안녕동) 현륭원(顯隆園)으로 옮긴 뒤 해마다 참배했다. 사도세자는 1899년에서야 장조(莊祖)로 추존됐기 때문에 정조의 현륭원 참배는 원행이라고 부른다.

정조의 을묘원행은 어머니의 회갑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1762년 남편인 사도세자가 28세의 나이로 숨진 뒤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한강을 건넌 정조는 노량진의 용양봉저정(龍양鳳저亭)과 만안교(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를 건너 사근참(시흥로와 과천로가 만나는 지점), 의왕시와 수원시의 경계인 지지대고개에 이르렀다. 현재 효행기념관과 정조의 동상이 세워진 효행공원이 들어서 있는 지지대고개는 국도 1호선이 지나는 교통의 요지다.

괴목(느티나무)이 우거진 인근의 작은 냇가 옆의 정자(괴목정·槐木亭)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정조는 화성의 농업 발전을 위해 만든 만석거 저수지를 지나 저녁 무렵 북문인 장안문을 통해 화성에 입성했다.

○ 백성에게 가는 길

정조는 화성에서 4일간 머물며 문무과 별시(別試)를 열고 현륭원을 참배했다. 현륭원 옆에는 1790년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조성한 원찰(願刹·망자의 명복을 기리는 사찰) 용주사가 있다.

현륭원에서 돌아온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와 함께 노인들을 위한 양로연을 베풀고 홀아비, 과부, 고아, 빈민 300여 명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 홀아비와 과부에게는 쌀 여섯 말, 고아에게는 네 말씩 돌아갔다.

7일째 되던 날 정조는 화성을 떠나 상경길에 올랐다. 정조는 다음 날 길에서 지방관에게 “경내의 백성들을 데리고 임금의 거둥길로 나와 대기하고 있으라”고 교시를 내렸다. 잠시 후 백성들을 마주한 정조는 “어가가 지나는 곳에서는 반드시 시혜를 베푼다”며 “고충을 숨김없이 밝히라”고 말했다.

임금 앞에 선 백성들은 망설였다. 일부는 “임금의 은혜가 높아 천청(天聽·임금의 귀)을 번거롭게 할 만한 질고가 없다”고 말했다. 정조는 그 말을 그대로 믿으려 하지 않았다. 정조는 “너희들이 모두 나의 적자(赤子·어린 아이)이니 어려움을 모두 털어놓으라”고 다그쳤다. 백성들은 “호역(戶役·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에 두 번 징발되는 것이 불만”이라고 답했다.

○ 원행은 거대한 정치 드라마

정조는 1794년부터 2년간 화성을 건설했다. 화성은 군사적으로 서울을 호위하는 남방 요새였다. 정조는 화성에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 외영을 두고 5000명의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는 노론벽파의 견제에서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정조는 13회 이상 현륭원을 참배하며 1100여 건의 상언(上言)과 격쟁(擊錚·백성이 임금의 행차 도중 징을 치고 억울함을 호소)을 처리했다. 수원화성박물관 김준혁 학예팀장은 “정조의 원행은 지도자가 백성들과 끊임없이 소통한 세계 정치사의 모범 사례입니다. 그렇기에 지금도 원행길을 되짚어보면서 정조의 정신을 만나려고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기 수원시는 해마다 조선 정조 관련 축제로 달아오른다. 18세기 말 정조의 화성 축조와 원행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 것이다. 화성행궁에서는 매일 정조의 친위부대였던 장용영 군사들이 교대하는 수위의식을 재현한다. 서울 덕수궁 앞 수문장 교대식과 유사한 의식이다.

매년 5월 5일에는 화성걷기대회, 10월 10일 화성축성 완공일을 전후해서는 화성문화제가 열린다. 화성문화제에서는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재현하고 정조의 효심을 기려 효행상을 수여한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을 극복하고 조선 후기 문화 르네상스를 이룩한 정조를 테마로 한 뮤지컬 공연도 열린다.

7월 말에는 원행을 재현하는 행사가 열린다. 2002년 시작된 이 재현 행사는 서울 창덕궁을 출발해 수원 화성을 거쳐 경기 화성시 안녕동 사도세자 무덤인 융릉까지, 옛길을 그대로 밟아간다. 2009년 4월에는 수원화성박물관이 화성 바로 옆 매향동에 문을 열어 정조의 원행과 화성의 의미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수원·안양=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