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 레미콘 ‘한시담합 신청’ 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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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7일 03시 00분


행정지도 품목 조사 확대로
통신-금융 등 물가안정 도모
산업계 “정책모순” 볼멘소리


공정거래위원회가 올해 통신 금융 유화 정유 제당 등 행정지도 업종의 담합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이들 업종이 서민생활 및 물가안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들 업종의 기업들은 정부의 행정지도를 이유로 사실상 가격정책 등에서 공동보조를 취하면서 담합 의혹을 피해왔다는 것이 공정위의 판단이다.

공정위는 2010년 업무보고에서 담합 근절 등 경쟁질서 확립을 5대 정책과제 중 최상위에 올려놓았다. 기업들이 행정지도를 담합을 피해 가는 ‘면죄부’로 사용하는 것을 더는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또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한시적으로 기업의 담합을 인정하는 합법적 담합도 허용하지 않을 방침이다.

하지만 ‘행정지도’와 ‘합법적 담합’은 상충되는 점이 많아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행정지도와 관련해서는 산업계가 “정부 방침을 따랐는데 공정위가 제재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 “정부 정책에 협조” vs “정부가 담합 가르치는 곳 아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2008년 2월 ‘경쟁제한적 행정지도의 문제점과 개선과제’ 보고서를 내고 “법적 구속력이 없지만 정부 정책을 따라야 하는 사업자는 실질적으로 행정지도를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라며 “행정부처 간의 상충되는 정책 집행 때문에 사업자만 피해를 보고 있다”고 밝혔다. 통신업계 관계자도 “정부의 행정지도가 허락하는 선에서 가격을 결정하다 보면 경쟁사와 비슷해질 수밖에 없다”며 “그걸 담합이라고 하는 것은 시장 구조를 모르고 하는 말”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공정위는 “문제의 핵심은 기업들이 행정지도를 빌미로 사전 혹은 사후에 별도로 가격 합의를 하는 것”이라며 “행정기관이 가격 인상 폭과 시기 등을 지도하지만 담합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2008년 13개 생명보험회사가 행정지도를 빌미로 퇴직보험 이율과 배당률을 담합했고, 2007년 10개 손해보험회사도 할인율을 서로 합의했다. 이들 사업자들은 공정위로부터 제재를 받은 뒤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으로부터 위법한 행위라는 판결을 받았다.

국제적인 흐름도 주시할 필요가 있다는 게 공정위의 주장이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은 최근 국제 카르텔 제재를 최우선 정책으로 밝혔고, 일본도 국제 카르텔 전담 인력을 확대하고 있다. 정호열 공정위원장은 “행정지도로 유발된 담합일지라도 외국 경쟁법 집행에서 면제되지 않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 경제위기 극복 vs 다른 산업에 전염

공정위는 지난해 초 업무보고에서 “가격담합이 아닌 감산(減産), 생산설비 축소 등을 업계 공동으로 추진하는 것이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불가피한 경우 한시적으로 담합을 인가하겠다”고 밝혔다. 인가요건으로 산업합리화, 불황 극복, 산업구조 조정 등 6가지 조건도 명시했다.

이를 계기로 레미콘 업계가 지난해 9월 공동 구매와 배분을 골자로 한 담합 인가를 신청했다. 영세한 레미콘 업계 특성상 건설사에 개별적으로 입찰하기보다는 조합이 대신 입찰해 물량을 따오고, 이를 회원사 간에 분배하는 게 효율적이라는 논리다.

이와 관련해 공정위는 내부적으로 담합 인가 불가 방침을 정한 것으로 확인됐다. 합법적 담합은 가격 이외 요소인 연구개발(R&D), 공동 운송 등에 초점이 맞춰진 것인데 레미콘 업계의 주장은 이와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또 레미콘 담합을 인가하면 유사한 중소 업체들의 민원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행정지도:

행정절차법 2조에 따르면 ‘행정지도’는 행정기관이 특정 행정목적을 이루기 위해 특정인에게 일정한 행위를 하거나 하지 않도록 지도, 권고, 조언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정부가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비율을 권고하거나 통신업계에 초당 과금제 도입을 권유하는 것 등이다. 법적인 강제성은 없지만 기업들은 현실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다.

:합법적 담합:

공정거래법 60조에 따라 공정거래법을 적용하지 않는 조합의 단체행동을 뜻한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09년 업무보고 때 합법적 담합 요건으로 산업합리화, 연구·기술개발, 불황 극복, 산업구조 조정, 거래조건의 합리화, 중소기업의 경쟁력 향상 등 6가지 조건을 밝혔다. 하지만 1997년 이후 공정위가 인가해 준 합법적 담합은 한 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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