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매년 6월 25일이면 들을 수 있는 ‘6·25의 노래’ 첫 구절이다. 그럼에도 미국을 비롯한 세계인들에게, 그리고 한국의 젊은 세대에게 6·25전쟁은 ‘잊혀진 전쟁’일지 모른다. 전쟁 발발 60년이 되도록 한반도는 법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여전히 전쟁 상태에 있다. 6·25전쟁 3년 1개월의 역사와 의미를 10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살펴봤다.》
1. 북한군 전면 남침… 사흘 만에 빼앗긴 서울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전면적인 남침을 개시했다. 국군 병력의 3분의 1이 외출 상태였던 일요일 아침을 노린 기습 공격이었다. 단 한 대의 탱크조차 없던 국군은 속수무책으로 퇴각해야 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는 데는 불과 사흘밖에 걸리지 않았다. 북한의 남침에 대해 1960, 70년대 일부 수정주의 학자는 북침설 또는 남침유도설을 주장했다. 하지만 1990년대 옛 소련의 외교문서들이 공개되면서 북침설과 남침유도설은 설득력을 잃었다. 김일성은 1950년 3월 30일부터 거의 한 달간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이오시프 스탈린과 3차례의 회담을 갖고 최종적으로 남침에 대한 결정과 작전지침을 받는다. 또 5월 13일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을 찾아가 남침 계획을 밝히고 마오의 동의를 얻었다.
2. 美, 유엔 안보리 소집 요구… 집단안전보장 첫 발동
소련과 중국이 김일성의 남침 계획에 동의한 것은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이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외면할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하지만 이는 결정적 판단착오였다. 전쟁 발발 몇 시간 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미국의 요청으로 긴급회의를 열어 북한의 남침을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즉각 철수를 요구했다. 이어 28일엔 북한의 무력침략을 규탄하며 이를 격퇴하기 위한 군사지원을 결의했다. 유엔 창설 이후 최초의 집단안전보장 조치가 결정된 데는 거부권을 쥐고 있던 소련의 불참이 결정적이었다. 7월 1일 최초의 미 지상군 스미스부대가 투입됐고 7일엔 미 극동군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가 지휘하는 유엔군사령부가 창설됐다. 모두 16개국이 전투병을 파병하고 5개국이 의료 지원에 나섰다.
3. 낙동강 방어선… 여기서 밀리면 끝이다
낙동강 전선은 한국을 죽음의 문턱에서 건져낸 생명선이었다. 전쟁 발발 1개월 반 만인 8월 초 북한군은 목포 진주 김천 포항을 함락했다. 김일성은 “8월이 오기 전에 끝내라. 8월은 승리의 달이다”라고 전투지령을 내렸다. 이에 유엔군은 8월 4일 진주∼김천∼함창∼안동∼영덕을 잇는 240km(남북 160km, 동서 80km)에 걸쳐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 최후 방어선은 미8군사령관 월턴 워커 장군의 이름을 따 ‘워커 라인’으로 불렸다. 미군은 낙동강 일대를, 국군은 동북부 산악지대를 담당했다. 북한군은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지만 국군과 미군은 이 방어선을 끝까지 사수했다. 특히 국군 제1사단은 다부동전투에서 인민군의 대공세를 저지하고 그 기세를 꺾었다.
4. 인천상륙작전… 천재 사령관의 역전 드라마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던 국군과 유엔군은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일거에 뒤집었다. 인천상륙작전은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함께 20세기 전쟁사에서 가장 성공적 상륙작전으로 평가된다. 인천상륙작전은 실행 때까지 우여곡절을 겪었다. 1950년 일본 도쿄(東京) 극동군사령부에서 열린 고위급회의에서 일부 지휘관은 거센 조류와 좁은 수로의 인천 앞바다는 상륙작전에 최악의 조건이라며 반대했다. 일부 지휘관은 성공 확률이 5000분의 1에 불과하다며 인천보다 남쪽 지역을 상륙지로 제안했지만 맥아더 장군은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고 작전을 감행했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에 이어 원산에서도 대규모 상륙작전을 펴려 했지만 원산항에 깔린 기뢰 때문에 함정들의 발이 묶여 실패로 끝났다.
5. 38선 넘어 압록강까지… 북진통일의 꿈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황을 역전시킨 뒤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작전을 펼쳐 북한군을 몰아내고 서울을 탈환했다.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9월 27일 유엔군사령관에게 38선 돌파와 북진작전에 대한 훈령을 하달했다. 이어 10월 1, 2일 국군과 유엔군이 잇달아 38선을 넘었고 맥아더 장군은 북한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발표했다. 국군이 강원 양양에서 38선을 돌파한 10월 1일은 국군의 날이 됐다. 처음부터 미국은 전쟁의 목표를 분명하게 정해두지 않았고 이 때문에 워싱턴 정부와 도쿄 사령부 간에는 상당한 이견이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한반도를 하나로 통일시키겠다”고 호언했다. 중공군의 개입을 우려하던 워싱턴 정부도 맥아더 장군의 압록강 진출을 막지는 못했다.
6. 중공군 개입… 밀고 밀리는 전투
중공군은 이미 10월 중순부터 압록강을 넘어 적유령산맥 구석구석에 포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군의 정보수집 능력에 큰 구멍이 나 있었다. 생포한 중공군 포로를 신문한 결과 중공군의 개입 사실이 드러났지만 맥아더 사령부는 이를 무시했다. 중공군은 11월 초까지 유엔군과 직접적인 접촉을 피하면서 이곳저곳에 유리한 진지를 확보하는 기동전법을 썼다. 이후 중공군은 전면적 공세를 펴며 파죽지세로 남하했고, 한때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해야 했다. 급기야 1951년 1월 4일 서울은 다시 북한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하지만 전열을 정비한 유엔군은 화력을 앞세워 반격에 나섰고 3월 초부터 전선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3월 15일 서울을 되찾은 유엔군은 3월 말에는 38선 가까이까지 밀고 올라갔다.
7. 맥아더 해임… 트루먼은 ‘영웅’을 용납하지 않았다
1951년 4월 11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을 전격 해임했다. 후임에는 매슈 리지웨이 8군사령관이 임명됐다. 8군은 짐 밴플리트 장군이 맡았다.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을 해임한 것은 정치적 라이벌 관계에 있던 두 사람이 6·25전쟁의 결말을 놓고 이견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진 것은 미국 정부가 승리를 거두려는 의욕이 부족했던 탓이라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선 중국 본토에 전면 공격을 가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트루먼 대통령은 “그가 극동지역의 황제가 되고 싶어 한다”며 노골적으로 맥아더를 비난했다. 결국 트루먼 대통령은 ‘전쟁영웅’ 맥아더 장군의 거듭되는 명령 불복종에 최고 군통수권자로서의 해임 권한을 사용했다.
8. 휴전회담… 승패 없는 지루한 전쟁의 중단
전쟁 초기부터 여러 국가가 휴전안을 제기했지만 휴전안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과 중공군 참전 등 변화하는 전황 속에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잔혹한 전쟁이 계속되자 유엔군과 공산군은 1951년 7월 전격적으로 휴전협상 개최에 합의했다. 양측은 7월 8일 개성에서 휴전을 위한 예비회담을 열고 10일 첫 본회담을 열었다. 이승만 정부가 강하게 반발하는 가운데 시작된 회담은 이후 2년 1개월 동안 개회와 정회를 반복하면서 575회나 개최됐다. 특히 공산군은 전쟁포로의 자유의사에 의한 교환 원칙에 합의하지 않아 회담은 두 차례나 각각 9개월씩 중단됐다. 회담은 1953년 1월 미국에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들어서고 3월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한 뒤 급물살을 타게 된다.
9. 한국 빠진 정전협정… 이승만의 ‘보이콧 외교’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사령관 마크 클라크와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사령관 및 중공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전쟁은 중단됐다. 이에 따라 남북은 휴전상태에 들어갔고, 남북한 사이에는 비무장지대(DMZ)와 군사분계선(MDL)이 설치됐다. 하지만 한국은 이 협정 서명에 끝내 참여하지 않았다. 정전협정에 앞서 6월 유엔군과 공산군이 포로교환 협정을 체결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북송을 거부하는 반공포로를 일제히 석방시키는 등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이른바 ‘소(小) 휴전회담’으로 불린 미국과의 협상에서 이 대통령은 한미 상호안전보장조약 체결과 장기 경제원조 등을 약속받았다.
10. 깊게 새겨진 전쟁의 상처… 긴장 여전한 한반도
포성이 멎은 지 57년, 한국은 잿더미 속에서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의 기적을 이뤘다. 하지만 여전히 한반도에는 군사적 긴장이 계속되고 있다. 휴전선과 이산가족, 국군포로 등으로 상징되는 전쟁의 상흔과 고통은 지금도 한반도를 휘감고 있다. 분단은 한국 사회 전반에 흑백 논리적 사고방식이 퍼지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한때 반공이라는 이름 아래 권위주의와 독재주의가 합리화됐다. 반독재를 명분으로 북한을 이상향으로 추종하는 세력이 생기기도 했다. ‘실패한 국가’ 북한은 핵무기 개발로 국제사회를 위협하면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6·25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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