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간에 벌어진 ‘강도론’ 파문은 양측의 갈등이 뿌리 깊은 불신에 기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대통령 측은 박 전 대표를 ‘경선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오만과 아집의 정치인’으로, 박 전 대표 측은 ‘이 대통령이 신의와 원칙을 부정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양측의 갈등이 장기화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 경선 앙금 해소 못해
두 사람 간의 갈등이 반복되는 것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생긴 앙금을 털어내지 못한 데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당시 박 전 대표 캠프는 이 대통령의 ‘BBK 사건’ 및 ‘도곡동 땅 차명 소유’ 연루 의혹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며 검증 공세를 펴서 도덕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비주류였던 이 대통령 측도 박 전 대표를 ‘자신만의 세계에 매몰된 여의도 정치인’으로 규정했다. 경선 당시의 앙금은 집권 후에도 양 진영을 껄끄럽게 만든 배경으로 작용했다.
○ 지켜지지 않은 동반자 약속
박 전 대표 측은 이 대통령이 대선후보 경선 이후 한 ‘동반자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큰 불신을 갖고 있다. 친박(친박근혜)계는 “이명박 정권은 친이(친이명박)와 친박의 공동정권인데도 친이계가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박 전 대표가 18대 총선 공천 직후 “국민도 속았고, 나도 속았다”고 말한 것도 권력 분점에 대한 암묵적 약속이 깨진 데 대한 반발이었다. 특히 박 전 대표는 지난해 9·3 개각에서 대선후보군에 속하는 정운찬 국무총리가 임명되자 이 대통령이 자신의 ‘국정운영 협조’를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에 친이계는 “박 전 대표가 계파를 이용해 사사건건 거부권을 휘두르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상당수 친이계 의원들은 집권 초 미국산 쇠고기 파동과 미디어관계법 처리 등 고비마다 박 전 대표가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에 기대는 발언으로 정부의 발목을 잡았다고 보고 있다. 한 친이계 재선 의원은 “박 전 대표가 17대 총선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만든 수도이전법을 지키겠다고 했다가 약속을 깨고 세종시 최초 수정안을 내놓았는데 이번엔 철저히 계파를 단속하며 수정 논의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스스로 국정의 동반자 지위를 저버린 것”이라고 말했다.
○ 판이한 두 사람의 스타일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의 정치 스타일이 크게 다른 것도 ‘한 지붕 두 가족’의 근본 이유로 꼽힌다. ‘실용주의’를 내건 이 대통령과 ‘원칙과 신뢰’를 중시하는 박 전 대표는 줄곧 충돌해 왔다.
이 대통령은 권위를 희생하면서라도 일을 성사시키는 리더십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작년 11월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대선 당시 세종시 원안 추진을 약속한 것에 대해 “부끄럽다”고 사과하며 수정안 불가피성을 호소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반면 박 전 대표는 정치적 이해에 따라 현안에 접근하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보인다. 2004년 한나라당 대표 시절 당 부설 여의도연구소가 박 전 대표를 위한 집권 전략을 비공개 브리핑하자 박 전 대표가 “정책이나 잘하세요”라고 한 것은 그의 정치관을 잘 보여준 사례다.
결국 이 대통령은 박 전 대표의 원칙을 ‘감정의 정치’로 보고 있고, 박 전 대표는 이 대통령의 실용주의를 ‘신뢰할 수 없는 정치관’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 양측 간 소통은 차단
지난 개각에서 이 대통령은 박 전 대표와의 소통을 위해 대구에 지역구를 둔 주호영 의원을 특임장관으로 발탁했다. 정권 초기 다양한 루트를 두드렸지만 효과를 내지 못하고 갈등만 빚자 공식 창구를 만든 것이다.
그러나 주 장관의 역할은 미미한 상태다. 지난해 11월 국회에서 주 장관이 이 대통령의 ‘세종시 논쟁 자제’ 요청 메시지를 전할 당시 박 전 대표는 주 장관과 눈을 잘 마주치지 않았다고 한다. 대선후보 경선 당시 박 전 대표의 손을 뿌리치고 이 대통령 캠프에 합류한 주 장관에게 소통 창구 역할을 기대한 것이 애초부터 무리였다는 말도 나온다.
현재로서는 소통 창구를 정상화할 마땅한 방법도 없다. 박 전 대표가 워낙 제한적으로 외부와 접촉하고 있는 데다 양측 간 신뢰도 이미 깨져 있어 간접적인 의사소통 방식으로는 불신만 키울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