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린턴家 4대째 이어진 ‘한국사랑’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3월 1일 03시 00분


3·1만세시위 지도… 아들-손자는 의료봉사… 3·1절 건국훈장

고 윌리엄 린턴(오른쪽)과 부인 샬럿 위더스푼 벨. 사진 제공 차종순 호남신학대 총장
고 윌리엄 린턴(오른쪽)과 부인 샬럿 위더스푼 벨. 사진 제공 차종순 호남신학대 총장
1912년 대학을 갓 졸업한 21세의 미국인 청년 윌리엄 린턴(1891∼1960·한국명 인돈)은 단출한 짐과 성경책 한 권을 가슴에 품고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 땅을 밟았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온 그의 눈에 비친 일제강점기의 조선의 현실은 처참하기만 했다. 헐벗고 굶주린 아이들이 거리에 쏟아졌지만 이들을 보호하고 가르칠 곳은 변변치 않았다.

린턴은 두고 볼 수만 없었다. 우선 전북 군산에 내려가 한 한교에서 성경과 영어를 가르쳤다. 1919년에는 일제의 압제에 맞서 만세 시위를 지도했다. 3·1운동 직후 미국 애틀랜타로 건너간 그는 미국 남부지역 평신도대회에 참석해 한국 독립운동의 비폭력 저항정신을 전했다. 이 일로 1940년 일제로부터 추방됐지만 광복 후 한국에 다시 돌아온 린턴은 말년에 암 투병을 하면서도 1959년 대전대(현 한남대) 설립에 매진했다. 치료를 위해 1960년 6월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2개월 만에 숨졌다.

그의 한국 사랑은 가문 대대로 이어졌다. 선배 선교사인 유진 벨 목사의 딸 샬럿과 결혼해 낳은 네 아들 가운데 셋째 아들 휴 린턴과 넷째 아들 드와이트 린턴은 선친의 뒤를 이어 호남지역에서 교육 및 의료봉사활동을 계속했다. 손자인 스티브 린턴은 1994년 유진벨 재단을 설립해 북한 주민에게 결핵약을 보급해 왔다. 한국 이름 ‘인요한’으로 더욱 유명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 존 린턴도 그의 손자 중 한 명이다.

그의 증손자인 데이비드 린턴은 현재 법무법인 율촌의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정부는 3월 1일 3·1절 경축행사에서 일제강점기 국권 회복운동과 교육사업에 헌신한 공로로 고 윌리엄 린턴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한다. 훈장은 유족을 대표한 손자 존 린턴 소장이 대신 받는다.이종식 기자 bell@donga.com

광주=김권 기자 goqu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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