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 옥상서 발각되자 건물벽 타고 도주… 격투끝에 잡혀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3월 11일 03시 00분


《온 국민의 공분(公憤)을 불러일으켰던 이유리 양(13) 살해사건 피의자 김길태 씨(33)는 도주했던 보름 동안 경찰의 예상대로 범행현장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주거지인 부산 사상구 덕포1동 일대를 전전하며 경찰의 포위망 안에서 은신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이날 1시간가량 경찰 조사를 받은 그는 혐의를 부인하면서 묵비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음식 없어진다” 상인 제보에 수사망 좁혀
경찰 4명 상대 격렬 저항… 1분여만에 상황 끝

김길태 “방범실태 알아봐라” 친척에 부탁도
경찰 안도… ‘공개수사후 살해’ 밝혀지면 곤혹

○ 묘연했던 보름간의 행적은?

경찰은 피로가 누적된 김 씨의 몸 상태로는 심도 있는 조사가 어렵다고 판단해 11일부터 본격 수사에 들어갈 계획이다. 이날 1차 조사에서 김 씨는 비교적 담담한 어조로 범행사실을 부인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그는 “그동안 덕포동 일대 빈집과 폐가, 건물 옥상 등지에서 숨어 지냈다. 유리는 모르고, 그 집에 간 적도 없다. 그동안 라면을 먹고 술을 마셨다. 담배도 많이 피웠다”고 진술했다. “배가 너무 고프다”는 말도 여러 차례 했다. 경찰은 “김 씨가 너무 지쳐 있어 밤늦게까지 조사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김 씨는 보름간의 도피생활을 모두 사건현장 인근에서 한 것으로 확인됐다. 검거 장소는 이 양의 집과 시신 유기장소 등 사건현장과 불과 300m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성폭력 범죄로 11년간 복역한 기간을 제외하고 덕포1동을 떠나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사건현장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김 씨는 1월 성폭력 혐의로 수배를 받자 인근에 살고 있는 친척 동생에게 찾아가 “사고를 쳤다. 사상구 일대 폐쇄회로(CC)TV 수와 모 종교시설의 방범실태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 것으로 알려져 경찰은 이 부분도 조사할 예정이다. 또 이달 5일경 이 친척 동생의 집에서 옷가지 일부를 몰래 가져간 것으로 전해졌다.

김 씨는 도피 장소로 옥상 문이 열려 있던 삼락동 빌라를 선택했다. 옥상 보일러실은 온기가 있어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배고픔과 담배 금단현상을 참지 못해 시장에서 몇 차례 절도를 한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 검거 순간은 영화의 한 장면

김 씨가 검거되는 순간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경찰은 “며칠 전부터 음식물이 없어진다”는 덕포시장 상인들의 신고를 접하고 이 주변에 대한 수색을 강화했다.

부산지방경찰청 소속 경찰 2명은 이날 오후 2시 44분 모 빌라 C동 옥상 문을 열었다. 김 씨와 비슷한 인상착의의 청년이 갑자기 옆 동인 B동 옥상으로 뛰기 시작했다. 건물 사이 간격은 60cm. 순간 “길태다”라고 외치며 뒤쫓았다. 김 씨는 곧장 B동과 그 옆 동인 A동 사이로 몸을 웅크렸다. 등은 A동 벽에, 양팔과 다리는 B동 벽에 대고 마치 ‘스파이더맨’처럼 벽을 탔다. 손쉽게 1층으로 내려온 김 씨는 뛰지 않고 유유히 걸었다.

그는 인근에서 순찰 중인 강희정 경사와 다시 맞닥뜨렸다. 회색 후드 티에 파란색 마스크를 쓴 남성은 김 씨 같았다. 강 경사가 그를 추격하자 몸을 돌려 도주하던 김 씨는 맞은편에 있던 이용 경사의 얼굴을 때리고 빠져나가려 했다. 뒤따르던 강 경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몸을 날려 김 씨를 덮쳤다. 이때 주민들은 “김길태다”라고 외치고 도주하는 김 씨를 막기 위해 발을 걸려고 시도하는 등 검거를 도왔다. 인근에 대기하던 동료 형사 2명도 발버둥치는 그를 제압했다. 불과 1분여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경찰은 “새벽에 내린 눈 때문에 다리를 삐끗해 1층에서 걸어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 경찰, 안도 속에 긴장

장기 미제사건으로 이어질까 봐 가슴 졸여온 경찰은 일단 안도하는 분위기다. 그동안 경찰이 벌인 김 씨 검거작전은 대(對)간첩작전 수준이었다. 이명박 대통령까지 검거 지시를 내리자 부산경찰 전원(7700명)은 7일부터 비상근무에 들어갔다. 국민적 관심이 김 씨 검거에 쏠렸지만 이렇다 할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 초동수사 실패와 여러 차례 검거 기회를 놓친 게 경찰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이날 김 씨가 검거되자 경찰 고위 관계자는 “국민께 죄를 짓는 심정이었는데 사건이 해결돼 다행”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 씨의 진술내용에 따라 경찰이 난처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이 양이 숨진 시점이 경찰이 공개수사에 나선 지난달 27일 이후라면 비난의 화살이 경찰에 집중될 수 있다. 경찰이 섣불리 공개수사에 나서면서 심리적 압박을 받은 김 씨가 이 양을 살해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부산범죄피해자지원센터 ‘햇살’은 숨진 이 양의 가족이 범죄피해자구조금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할 예정이다. 구조금은 범죄행위로 숨지거나 중상해를 입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서 보상을 받지 못할 때 국가에서 대신 지급하는 제도다.

부산=윤희각 기자 toto@donga.com
장관석 기자 jks@donga.com
조용휘 기자 silent@donga.com


▲ 동영상 = 이유리 양 납치 살해 피의자 김길태 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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