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 4만여명 공격 맞서 열흘간 12차례 격전 치러 “패전한 김일성 3일간 통곡”
지뢰밭 사이로 오른 전망대 DMZ 굽어보니 비장미 가득…철책선 초병의 눈빛만 초롱
강원도 철원군. 한국 현대사에서 이보다 더 가슴 시린 곳이 어디 있을까. 광복 후 분단과 함께 북한 땅으로 넘어갔던 곳, 1950년 6·25전쟁 때 약 3분의 2만 수복된 곳. 6·25전쟁 당시 격전이 치러졌던 이곳 철원은 곳곳이 전쟁의 상흔이다. 백마고지는 철원에서도 손꼽히는 분단의 상징이다.
6·25전쟁 중이던 1952년 10월 6일 저녁, 중공군 4만4000여 명이 백마고지를 공격했다. 김종오 소장이 지휘하는 보병 제9사단 예하의 제28, 29, 30연대 등 2만여 병력은 중공군과 맞섰다. 그해 10월 15일까지 열흘 동안 12차례에 걸쳐 선혈이 낭자한 전투를 벌였다.
고지를 뺏고 뺏기는 치열한 공방전. 395m 높이의 작은 고지 하나를 점령하기 위해 이렇게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것은 세계 전쟁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10월 15일 오전, 전투는 국군의 승리로 끝났다. 중공군은 1만여 명, 국군은 35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피로 물든 꽃다운 젊음. 그들이 끝내 지켜낸 것은 대한민국의 자유였다.
18일 오후 철원읍 대마리 보병 제5사단의 백마고지 전적기념관을 찾았다. 위령비, 기념관, 기념탑, 자유의 종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 백마고지를 마주보고 섰다. 철원평야 위로 불쑥 솟아오른 고지. 1952년 백마고지 전투는 6·25에서 길이 빛나는 승전이다. 고지 오른쪽 뒤편으로 북한 땅 고암산이 눈에 들어왔다. 일명 김일성고지다. 백마고지를 손에 넣지 못한 것이 너무 억울해 김일성이 이 산에 머물며 3일 동안 통곡했다고 해서 김일성고지란 이름이 붙었다.
철원 일대 중부전선 최전방에 아직 봄은 찾아오지 않았다. 기온은 종일 영하를 맴돌았다. 그러나 날이 풀리면 백마고지 전적기념관 주변에 붉은 철쭉이 핀다. 이날 위령비 앞에서 5사단 병사들이 꽃을 단장하고 있었다. 전쟁과 꽃. 잠시 처연한 상념에 빠지는 사이 한 노병의 음성이 들려왔다. 1953년 백마고지에서 전투에 참가했던 참전용사 이승목 씨(78). 그는 9사단이 철수한 뒤 1953년 휴전 때까지 이곳에서 4개월 동안 적과 싸웠다.
“1952년 열흘간의 전투 이후에도 백마고지에선 계속 전투가 벌어졌죠. 1953년 휴전 직전에도 백마고지는 자고 나면 시체였어요. 늘 시체를 밟고 다녔죠. 백마고지를 뺏기면 의정부까지 뺏기니까 목숨 걸고 싸웠던 거죠.”
백마고지를 뒤로 하고 서쪽 편 민통선(민간인통제구역) 안으로 들어갔다. 중부전선 비무장지대(DMZ)와 맞닿아 있는 경기 연천군 열쇠전망대에 올랐다. 3월 중순, 이곳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전망대와 감시소초(GP)로 오르는 길, 일부 병사는 일렬종대로 행군을 했고 일부 병사는 4열 종대로 구보를 했다. 진입로 양옆은 모두 지뢰밭이었다.
열쇠전망대와 GP에서 바라본 DMZ는 장관이었다. 잎이 떨어지긴 했지만 나무는 무성했고 곳곳에 습지가 펼쳐져 있었다. 검은 독수리 한 마리가 천천히 상공을 선회했다. 그 밑으로 크고 작은 능선이 서로 겹치면서 한 폭의 장대한 그림을 만들어냈다. 특히 ‘T본 능선’이 인상적이었다. 위에서 내려다봤을 때 모양이 T자형이라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1952년 정찰하던 미국 육군 중위 넬리 소대장이 중국군 1개 중대와 조우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T본 능선은 다른 능선에 비해 더욱 꿈틀거렸다. 그 굴곡의 능선은 우리 역사 그 자체다. 6·25의 상흔이자 그것을 헤쳐나갔던 역동적인 역사다.
철원지역 중부전선은 온통 전쟁의 상흔이자 분단의 상징이다. 1951년 1월 철원에서는 국군이 대적(對敵) 방송으로 민요 ‘아리랑’을 틀었다.
‘우리나 님은요 날 그려 울고/전쟁판 요내들 임 그려 운다/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를 울며 넘네’
이 노래를 듣고 북한 병사들이 매일 40여 명씩 귀순해 왔다. 아리랑은 노래 탄알이었다. 그래서 아리랑 음탄(音彈)이라고 했다. 김연갑 한민족아리랑엽합회 상임이사는 “국군에게는 향수를 달래는 노래로, 인민군에게는 심리전 선무용으로 쓰였다”고 말한다.
긴장이 가득해 오히려 더 아름다운 비극의 땅 DMZ. 해가 넘어가고 남방한계선 철책선 조명등에 하나둘씩 노란 불이 들어왔다. 경계를 서는 젊은 병사들의 눈빛이 더욱 빛나기 시작했다. 그 위로 기러기들이 줄지어 날아갔다. 밤이 찾아온 중부 전선. 어디선가 아리랑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철원·연천=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취재 협조: 육군 제5사단, 육군본부
▲ 열흘간 전투 24번이나 주인 바뀐 격전지 지금은…
▼고량주에 취한 중공군 꽹과리 치며 돌진 “죽어도 여기서 죽자” 아군 퇴로에 철조망▼ “아군, 적군 가릴 것 없이 포탄이 끊임없이 쏟아졌지. 아군 포탄이 아군에게도 많이 쏟아지니까 대대장이 사단장에게 ‘당신 죽이겠다’고 대들 정도였어. 백마고지에는 수풀이 우거졌었는데 워낙 포탄이 많이 떨어지니 땅이 모두 뒤집혔지. 먼지가 마치 눈처럼 무릎까지 쌓였어. 사상자들이 사방에 널려 말 그대로 우리는 시체를 넘고 또 넘어 싸웠지.”
백발이 성성한 백마고지전투(1952년 10월 6∼15일) 참전 노병 8명이 동아일보의 6·25전쟁 60주년 기획시리즈 인터뷰를 위해 19일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백마고지참전전우회 사무실에 모였다. 이들 대부분은 1950년 말 17, 18세의 어린 나이에 입대해 사병으로 백마고지에서 싸웠다.
전투 첫날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송윤식 씨(78)는 당시 9사단 30연대 3대대 12중대 75mm 무반동총 사수였다. 송 씨는 “중공군 귀순 장교가 중공군이 백마고지로 진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알려줬다. 9사단은 5일부터 비상이 걸렸고 이어 적군 비행기 3대가 9사단 사령부를 폭격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박명호 씨(77)는 “중공군은 항상 전투를 3단계에 걸쳐 시작했다”고 소개했다. 먼저 ‘갈고리 부대’가 땅을 훑어 지뢰를 제거하면 ‘가마니 부대’가 철조망에 가마니를 씌워 이동로를 확보하고, 곧이어 고량주에 취한 병사들이 북과 꽹과리를 치며 몰려들었다는 것이다.
노병들은 참혹했던 전투 현장을 떠올리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중공군은 분대장 이상이 아니면 총이 없었어. 사병들은 수류탄 몇 개만 든 채 몰려와 육박전을 벌였지. 하지만 수가 워낙 많아서 수류탄을 던져도 금방 그 자리가 새로운 중공군으로 채워질 정도였어.”(유상윤 씨·78)
“어느 날 9중대에 보충병으로 26명이 배정됐는데, 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우리 편까지 가는 도중에 포탄에 많이 희생돼 고지 위의 중대장 앞에 도착한 인원은 8명에 불과했지. 이들도 중대장 인근에서 포탄이 터져 대부분 다치거나 죽었어. 총 한번 못 쏘고 죽은 사람도 부지기수였어.”(김영린 씨·77)
“고지를 올라가다 발에서 ‘물컹’ 하고 미끄러운 것이 밟히면 영락없이 시체였어.”(강인순 씨·78)
“백마고지에 올라갈 때 죽어도 거기서 죽자며 고지 아래에 철조망을 쳤는데, 아침에는 우리가 올라가 점령하고 저녁에는 중공군이 점령하고…. 중공군이 죽기 살기로 올라와 이젠 죽었구나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이재천 씨·77)
“외곽에서 포를 많이 쐈는데, 포병들은 포신에 불이 붙어서 물 붓고 쏘기도 했지. 미군 포병들은 너무 더워서 속옷만 입고 쐈어.”(박무길 씨·77)
엄청난 희생 탓에 새파란 신병들도 곧바로 전투에 투입됐다고 한다. 용재화 씨(77)는 “신병들을 항공기로 수송해 바로 전장에 내보냈는데, 포탄 소리에 신병들은 겁을 크게 집어 먹어서 고참은 이들에게 ‘소리만 크게 지르라’고 주문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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