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났던 사람이나 남아 있던 사람이나, 동아에 몸담았던 모든 방송사원들은 영광과 시련을 같이했던 동아의 옛날을 지금도 잊지 않고 지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정치권력과 기업으로부터 독립돼 오로지 방송의 정도(正道)를 걸어왔던 동아방송의 전통을 이어갈신 동아방송의 출현이 기다려진다.” -최창봉 한국방송인회 이사장, 자서전 ‘방송과 나’에서》
동아방송은 1963년 4월 개국한 이래 신군부의 언론사 강제통폐합으로 1980년 11월 강제 폐방되기 전까지 동아일보의 저널리즘 가치를 방송으로 구현했다. 동아방송은 동아일보와 함께 엄혹한 시기에 국민의 ‘입과 귀’ 역할을 하며 비판보도를 거침없이 수행하면서 청취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개국 1년여 만인 1964년 2월 공보부 조사에서 33.5%의 청취율로 당시 전국 방송망을 갖고 있던 KBS를 제외하고 1위를 기록했다. 당시 동아방송이 새로 내놓은 프로그램들의 포맷과 내용은 이후 한국 방송의 모태가 됐다. ‘유쾌한 응접실’은 한국 토크쇼의 원조였고 ‘여명 80년’ ‘정계야화’가 인기를 끌면서 이후 다른 방송에서도 정치 드라마가 봇물을 이뤘다. 더욱이 ‘명작극장’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를 비롯해 동아방송의 품격있는 프로그램들은 한국의 중장년층에게 아직도 추억거리다.
○ 방송 저널리즘의 산실
동아방송 뉴스는 기존의 방송 뉴스와 차별화됐다. 강현두 서울대 명예교수는 “당시 라디오와 TV 뉴스는 아나운서들이 ‘읽는 뉴스’였지만 동아방송은 ‘보도하는 뉴스’를 선보이며 이후 방송 저널리즘을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동아방송은 기자들이 현장을 누비며 보도한 ‘DBS 리포트’, 전화 인터뷰와 특파원 코너 등 여러 코너를 엮어 현재와 같은 뉴스의 틀을 마련한 ‘뉴스 쇼’ 등 다양한 포맷의 뉴스를 통해 심층 분석과 해설을 제공했다.
1963년 10월 49명이 익사한 경기 여주군 조포나루터 나룻배 사건, 11월 이득주 중령 일가 몰살 사건 등의 첫 보도는 동아방송을 통해 나갔다. 1968년 1월 북한 무장공비 서울 침투 사건 때 생포된 김신조와의 단독 인터뷰도 동아방송을 통해 전파를 탔다.
동아방송과 동아일보는 ‘신문과 방송 겸영’으로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동아방송 뉴스 해설에는 이동욱 전 동아일보 회장, 천관우 전 동아일보 주필 등 신문의 논객들이 참여해 해설의 무게를 더했다. 동아일보가 파견한 해외 특파원은 동아방송 기자로도 참여해 1964년 도쿄 올림픽, 1960년대 베트남전 등 해외 뉴스를 생생하게 전했다.
동아방송은 동아일보와 함께 부당한 권력에 맞서면서 제작진이 구속되기도 했다. 라디오 칼럼 ‘앵무새’를 제작한 김영효 PD 등 방송사 간부 6명은 1964년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권력을 통렬하게 비판했던 게 이유였다. 동아방송은 이후에도 유신 정권의 탄압을 받아 ‘뉴스 쇼’ 등 프로그램이 폐지되고, 동아일보 광고사태 때도 프로그램에 붙는 광고가 대부분 떨어져 나갔다.
○ 한국 방송 프로그램의 선구자
동아방송 프로그램에는 ‘한국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게 많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동아방송의 프로그램들은 격조가 있으면서도 참신성이 뛰어났다”고 말했다.
동아방송은 아나운서 대신 개성있는 표현력으로 방송을 진행할 수 있는 ‘퍼스널리티’ 개념을 도입했다. 국내 1호 디스크자키(DJ) 최동욱 씨가 마이크와 콘솔을 혼자 조작하며 진행한 탑튠쇼는 최 씨를 보기 위해 방송국 주변으로 몰려든 오빠부대를 낳았다.
전영우 아나운서실장이 진행한 ‘유쾌한 응접실’은 당시 양주동 동국대 교수, 김두희 서울대 교수 등 명사들을 초청해 품격있는 유머와 대화를 나누며 토크쇼의 이정표가 됐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는 국내에서 처음 시도된 청취자 참여 토론 프로그램이었다.
교통 체증을 줄이고 기름을 아끼자는 취지로 1964년 5월 시작한 캠페인 ‘걸어서 가자’는 한국 방송 캠페인의 효시였다. 동아방송은 캠페인 송을 만들어 수시로 내보냈다. 불우한 이웃을 돕기 위한 실화 자선극 ‘이 사람을!’은 청취자들의 뜨거운 호응으로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제공했다.
○ ‘신 동아방송’ 출범의 당위성
성공적 방송 언론으로 자리잡았던 동아방송은 1980년 11월 신군부에 의해 날개가 꺾였다. 국군보안사령부는 1980년 11월 14일 언론사 대표들을 소환해 언론사 포기 각서를 쓰도록 강요했다. 통폐합은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에 집중됐다. 각서 쓰기를 거부한 언론사 대표들은 경영상의 불이익을 받을 것이라는 협박과 신변 위협에 시달렸다.
당시 김상만 동아일보 회장과 이동욱 사장은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 보안사 지하실로 소환됐다. 보안사의 강요에 김 회장이 “혼자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며 거부하자 보안사 요원들은 “동양방송 등 다른 방송사들도 각서를 이미 썼다” “동아방송을 내놓지 않으면 동아일보 자체를 통폐합하겠다”고 협박했다.
김 회장과 이 사장은 두 시간여 동안 각서 작성을 거부했지만 이를 쓰지 않으면 동아일보에 위해가 닥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동아방송 허가와 관련한 일체의 권한과 기자재를 포기하고 이를 KBS에 양도한다’는 각서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동아방송은 KBS에 통폐합됐다. 언론사 강제통폐합은 이후 30년 동안 방송 3사의 기형적인 과점 구조를 정착시켰다.
올해 1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1980년 신군부의 언론사 강제통폐합이 불법이며 국가가 관련 피해자들의 피해를 구제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권고 결정을 내렸다. 이는 국가기관이 론사 강제통폐합과 관련해 국가의 책임을 표명한 첫 사례다. 이는 동아방송의 유산을 이어가는 새로운 동아방송의 출범이 당위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