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학도에서 美해병 장교로… 美 캐스트너 중위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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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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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복은 곧 존경과 명예… MIT 장학금도 포기했죠”
반대하던 부모도 결정 존중… 남동생은 공군장교 길 걸어

주디스 캐스트너 미국 해병대 중위(왼쪽에서 두 번째)와 아버지 마이클(왼쪽), 같은 학교에서 공군 ROTC 과정을 밟고 있는 동생 데이비드(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어머니 엘런 씨. 사진 제공 주디스 캐스트너 중위
주디스 캐스트너 미국 해병대 중위(왼쪽에서 두 번째)와 아버지 마이클(왼쪽), 같은 학교에서 공군 ROTC 과정을 밟고 있는 동생 데이비드(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어머니 엘런 씨. 사진 제공 주디스 캐스트너 중위
“어머니는 처음에 반대가 무척 심했어요. 대부분의 어머니가 그렇듯 딸이 좀 더 편안한 환경에서 사는 것을 원했죠. 반면에 아버지는 항상 저의 결정을 존중하셨어요. 하지만 막상 이라크전과 아프가니스탄전이 잇따라 터지자 아버지도 반대했어요.”

미군 해병 장교들의 훈련소인 버지니아 주 콴티코에서 만난 주디스 캐스트너 해병 중위(22·여)는 조만간 일본 오키나와 미군기지로 갈 예정이다. 미 동부의 명문 공대인 렌슬러 폴리테크닉 인스티튜트(RPI)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한 그는 대학 다닐 때 해병대 학생군사교육단(ROTC)에서 학군장교 교육을 받았다. 지난해 여름 대학을 졸업하고 올 1월 콴티코 기지에서 6개월간의 장교 기본훈련과정(TBS)을 이수했다. 남자들도 힘들어하는 해병대 장교의 길을 걷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버지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제2차 세계대전 때 미 해군에서 복무한 할아버지와 삼촌 얘기를 자주 들려줬어요. 이때부터 어렴풋이 군인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그리고 한국에서 국제학교를 다닐 때 미군과 가족들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미국 국민이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희생하고 있는지를 알게 됐어요.”

아버지가 미국인, 어머니가 한국인인 캐스트너 중위는 뉴욕에서 태어났지만 2세 때 한국으로 이사와 12년 동안 어린 시절을 한국에서 보냈다. 아버지가 서울의 한 대학에서 교수로 지냈기 때문에 가족이 모두 서울에서 생활했다. 2001년 9·11테러가 터졌을 때 그는 서울에 있었다.

“삼촌이 쌍둥이빌딩 근처의 무너진 건물에서 근무를 했어요. 하루 종일 생사를 확인할 수가 없었어요. 지구 반대편에 있으면서 TV로 상황을 지켜본다는 게 너무 고역이었습니다. 미국이 공격을 받을 때 미국 국민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더욱 더 똘똘 뭉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고교 졸업 후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장학금을 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기숙사비와 생활비까지 지원받을 수 있는 RPI를 선택했다. 캐스트너 중위의 삼촌과 숙모도 해병대에서 복무해 아버지 집안은 ‘군인 가족’으로 통한다. 삼촌은 베트남전 때, 숙모는 베트남전이 끝난 뒤 10년 동안 해병대에서 복무했다.

“아버지는 군인들이 미국에서 얼마나 존경받는지 이들을 통해 알게 됐어요. 어머니도 미국이 군인들을 훌륭하게 대접하는지를 알게 된 뒤부터는 저의 결정을 자랑스러워했어요.”

전쟁에서 부상하거나 죽을 수도 있는데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해병대에선 누구나 아프간이나 이라크로 가기를 원한다”며 “가족뿐 아니라 미국 국민의 자유를 수호하는 전쟁이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동생인 데이비드 캐스트너 씨도 장교의 길을 택했다. 데이비드 씨는 RPI에서 공학을 전공하며 공군 ROTC 교육을 받고 있다. 아버지 마이클 캐스트너 씨(뉴욕시립대 교수·영문학)는 “미국에서 제복 입은 장교는 아주 명예스러운 직업이기 때문에 아이의 결정을 존중했다”고 말했다.

콴티코(버지니아 주)=최영해 특파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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