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U제복이 존경받는 사회]<中>잊혀진 한국의 영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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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8일 03시 00분


“훈장, 장롱에 처박은지 오래… 한준위도 그렇게 잊혀질지…”

제2연평해전 부상 권기형씨
대선주자 앞다퉈 찾아오더니
이력서 해전경력 써도 시큰둥

순직 서준호 소방관의 아내
유족 연금 고작 月60만원
정말 필요한건 꾸준한 관심

故 박경조 경위의 세식구
풀죽은 아이들… 생활비 걱정
결국 유족들 홀로 짐 짊어져


“한주호 준위님요? 훌륭한 분이지만 그분도 곧 잊혀질 겁니다.”

6일 오후 경기 화성시의 한 국밥집에서 만난 권기형 씨(29)는 씁쓸히 웃었다. 권 씨의 왼손 엄지손가락과 네 번째 손가락은 눈에 띌 정도로 짧아 보였다. 2002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 당시 참수리 357호 갑판 수병이던 권 씨는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과의 전투 도중 왼손에 총알이 관통하는 부상을 입었다. 고통과 함께 손이 너덜거렸다. 몽롱한 눈이었지만 동료들이 픽픽 쓰러져 가는 모습을 똑똑히 목격했다. 그리고 8년이 흘렀다.

○ “훈장? 장롱에 처박아 놓은 지 오래”

“보세요!” 권 씨의 팔뚝에는 20cm가 넘는 굵은 상처가 있었다. 6번의 수술을 통해 팔뚝에서 살과 피부를 떼어내 손가락을 붙였기 때문이다. 당시 권 씨가 국군수도병원에 입원하자 위문방문이 줄을 이었다. 2002년 대선을 앞둔 대통령 후보들이 직접 방문해 권 씨를 위로했다. 미스코리아들도 병원을 찾았다.

“사회 관심도 한철입니다. 6월이면 국가보훈처 같은 곳에서 ‘잘 지내냐’는 전화 오는 게 전부입니다. 저는 그 어떤 자부심도 느낄 수 없습니다.” 권 씨에게 남은 것은 명예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무직’ 신분뿐이었다. 한국농업전문학교(현 농수산대)에 복학했지만 농업 최고경영자(CEO)가 되겠다는 꿈은 손 때문에 접어야 했다. 일반회사에 원서를 냈지만 ‘그 손으로 뭘 할 수 있느냐’는 핀잔만 받았다. 유공자 경력을 인정받아 2008년 현금 운송회사에 취직했지만 지난해 계단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친 후 그만뒀다.

“훈장요? 지금은 장롱에 처박혀 있습니다. 전투에 참여한 것은 자랑스럽지만 ‘내가 괜히 군대 갔지’란 생각도 듭니다. 연평해전 이야기는 아예 하지 않습니다.”

○ “아빠 없는 아이, 남편 없는 아내”

낙인처럼 남은 연평해전 상처 2002년 제2연평해전 당시 참수리 357호 갑판 수병으로 전투 도중 다친 권기형 씨의 왼손(작은 사진)을 본 사람들은 “연평해전이란게 있었어요”라거나 “그럼 얼마나 받았느냐”고 묻는다. 권 씨는 “주변 사람들의 무관심한 반응에 상처가 크다”며 손을 감쌌다. 화성=원대연 기자
낙인처럼 남은 연평해전 상처 2002년 제2연평해전 당시 참수리 357호 갑판 수병으로 전투 도중 다친 권기형 씨의 왼손(작은 사진)을 본 사람들은 “연평해전이란게 있었어요”라거나 “그럼 얼마나 받았느냐”고 묻는다. 권 씨는 “주변 사람들의 무관심한 반응에 상처가 크다”며 손을 감쌌다. 화성=원대연 기자
현재 보훈처에 등록된 전공사상자 수는 20만 명(2월 기준)이 넘는다. 부상자들과 유족들은 “남는 건 망가진 몸과 풍비박산된 가정뿐”이라고 토로했다. 부산 해운대경찰서 소속 정덕길 경위(54)는 지난해 4월 범인 검거에 나섰다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이후 반신불구가 돼 재활치료가 필요했지만 치료비가 만만치 않았다. 재활치료 보조기 등은 건강보험 비급여 항목이라 스스로 부담해야 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하는 건 부상자뿐 아니라 유족들도 마찬가지다. 박경조 해경 경위(당시 48세)는 2008년 9월 중국 어선을 단속하다 공격을 당해 실종된 후 17시간 만에 숨진 채로 발견됐다. 6일 서울 은평구 불광동 자택에서 만난 박 경위의 부인 이선자 씨(47)는 “아빠가 들어온 날이면 아이들이 신이 나 집이 들썩들썩했는데…”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18세, 12세인 두 아들은 2008년 고향인 전남 목포시를 떠나 낯선 서울로 이사 온 뒤 명랑하던 성격이 많이 사라졌다. 이 씨는 남편 사망 후 보훈처 지원금, 연금 등을 받아 생활하고 있지만 중고교생 아들의 교육비 등 생활비가 부족해 걱정이 크다.

경남 마산시에 사는 김영희 씨(56·여)의 남편 서준호 소방관(당시 46세)은 2000년 경남 창원시 성주동에서 대형화재를 진압하다 순직했다. 사라진 남편의 자리를 채운 것은 월 연금 60만 원뿐이었다. 이후 김 씨는 식당일을 하며 두 딸과 아들을 키워 왔다. 고된 노동으로 고혈압이 악화됐고 허리와 등이 아파 4년 전부터 식당일도 그만뒀다.

○ “따듯한 시선이 필요해요”

2002년 제2연평해전 이후 보상체계가 개선돼 군인이 순직할 경우 가족들은 1억 원 안팎의 ‘군인사망보험금’을 받는다. 경찰, 소방관 등도 비슷한 수준이다. 예전보다 보상 수준은 나아졌지만 유족들은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하고 자녀교육 등을 체계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전문가들은 군인이나 경찰, 소방관이 업무 수행 중 사망하거나 부상할 때만 반짝 관심을 갖는 사회 분위기가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한국인들의 영웅에 대한 정서는 ‘특별한 능력과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사람’에 가까워 평범한 경찰, 소방관이 목숨을 건 행동을 하다 사망하면 ‘희생자’로 규정하고 동정을 보내다 금방 잊어버린다”고 지적했다.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강은지 기자 kej09@donga.com

장관석 기자 jks@donga.com


▲동영상=故 한주호 준위의 ‘외길인생’ 추모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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