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건축’ 등의 일본어 잡지에 ‘이상한 가역반응’이나 ‘3차각 설계도’ 등의 난해한 시를 발표했던 무명 시인 이상이 일약 독자들의 시선을 끌게 된 것은 1934년 7월 ‘조선중앙일보’에 발표한 ‘오감도(烏瞰圖)’ 15편을 통해서였다. 그로테스크 미학으로 독자들의 기대지평을 산산이 깨뜨린 이 충격적인 시는 “무슨 개수작이냐” “무슨 미친놈의 잠꼬대냐” 등의 비난과 항의가 쏟아져서 학예부장 이태준이 사표를 넣고 다닐 정도였다. “까마귀 눈으로 세상을
본다” 건축용어 ‘조감도’ 빗대 표현
이상은 “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 년 떨어지고도 마음 놓고 지낼 작정이냐”라는 회한에 찬 ‘작자의 말’을 쓴다. 랭보의 말처럼 “현대적이어야 한다. 어떻게든 절대적으로 현대적이어야 한다”는 미적 모더니티의 선언이다.
당대 독자들의 항의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오감도 시제1호’는 한국 현대시 최고의 명시일 뿐 아니라 역사성과 보편성을 아울러 갖춘 불멸의 ‘열린 텍스트’다. 제목 ‘오감도’는 건축용어인 ‘조감도’를 변형한 신조어로 “까마귀의 눈으로 인간들의 삶을 굽어본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차마 인간의 눈으로 내려다본다고 하지 못할 만큼 무시무시한 시대 풍경이 ‘까마귀의 눈으로 본 세계’라는 낯설게 만들기 기법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당시 일본의 파시즘적 정국 안에서의 끝이 보이지 않는 공포를 이 시는 잘 보여준다.
막다른 골목을 13인의 아해들이 질주하고 있는 풍경은 생각만 해도 그로테스크하다. 13이란 숫자의 의미에 대해서도 ‘최후의 만찬에 합석한 예수+12인의 사도’ ‘당시의 조선 13도’ ‘25시와 같이 시계 이후의 시간’ 등으로 해석이 다양하다. 닫힌 세계를 질주하는 아해들은 무엇을 위해 질주하는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면서 무섭다고 하면서 질주하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무서운 존재들이며 동시에 서로를 무서워하는 존재들이다. 김홍중은 이 작품을 ‘한국 모더니티의 창세’로 보면서 아해란 ‘근대의 입양아들’로 해석될 수 있다고 한다. 식민지를 통해 폭력적으로 경험된 근대 속에서 식민지인이란 성인이 아닌 아해들이며 이 아해들이 구성하는 사회란 것이 공포스럽다는 것이다. 매우 신선한 지적이다.
또한 이 시는 근대에 대한 절망과 탈근대를 향한 탈주를 보여준다. 근대라는 것 자체가 합리성과 과학정신에 의한 세계의 발전과 계몽적 미래와 역사의 진보를 믿는 목표지향적 질주와 연관된다. 근대의 성격이 바로 닫힌 세계 안을 죽자구나 질주하는 맹목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기묘한 결론으로 웃음 유발 식
민지 애환 치유 처방전 돼
그러나 이상은 닫힌 세계를 질주하는 맹목적 근대를 비판하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13인의아해는도로를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것이 ‘오감도 제1호’의 결론이다. 결론 같지 않은 결론이고 장난스러운 그로테스크다. 그로테스크 아이러니다. 피식 웃음이 나오는 결론이지만 근대의 막다른 골목을 뚫고 탈근대의 자유로 탈주하는 해방의 지점이다. 근대의 이분법적 절벽을 탈근대의 유희로 해체하면서 근대성의 우울과 그 편집증적 공포를 탈근대의 웃음으로 가볍게 뛰어넘는다. 순간 공포가 웃음이 된다. 여기에 이상문학의 약이자 독, 곧 파르마콘이 있다. 그래서 이상의 ‘오감도 시제1호’는 바로 21세기 인(人), 우리의 공포의 진단서이면서 동시에 치유의 처방전이 된다. 종말론적 시간 속을 자본의 채찍에 내몰려 달려야만 하고 옆의 친구와 동료를 무서워하며 무한질주로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막다른 골목을 버리고 뚫린 골목으로 탈주해도 좋다는 하나의 포스트모던한 해방의 처방전을 내밀고 있다. 정말 도로를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은가? 근대성 착취의 벽에 균열의 틈새를 살짝 내도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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