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북스] “광고 천재 아니다, 치열하게 노력했을 뿐”

  • 입력 2010년 4월 21일 15시 00분


'광고천재 이제석'의 이 남자가 사는 법

● "한국의 공익 광고계에 파란을 몰고 오겠다."
● "삼성? 머리는 좋은데 절대 반장할 수 없는 스타일"
● "국가 브랜드? 김연아가 답이다. 그녀만큼만 해도 대성공"

이제석 씨.
이제석 씨.
"찔끔찔끔 왔다 갔다 하니 귀찮고 불편하더군요. 그래서 1년간 서울로 장기출장을 온 셈이죠."

미국 뉴욕의 화려한 성공신화를 뒤로하고 홍대 앞으로 돌아온 '기인'이 있다. 게다가 그는 젊은 광고인이라면 누구라도 입사를 꿈꿀 FCB, JWT, BBDO 등 세계적 광고회사들을 박차고 나와 더 큰 화제를 모았다. 이제 서른도 안 된 광고기획자 이제석 씨(29) 얘기다.

복귀 후의 행보도 이채롭다. 상업광고 시장이 아닌, 천편일률적으로 진행된 한국의 공익광고 시장부터 혁신해 보이겠다며 출사표를 던진 것. 우선 자신의 광고 철학에 동의하는 젊은 인재들을 모아 '이제석 광고연구소(www.jeski.org)'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지난 반년 간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NGO들를 샅샅이 훑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어휴, 지나치게 착한 소리만 나열하고 계시더군요. '기부하자! 헌혈하자! 착하게 살자!…' 그게 무슨 공익광고에요. 그냥 듣기 좋은 당위론에 불과해요. 사람들의 행동을 바꿀 만한 힘이 없잖아요. 제가 제대로 된 작품을 보여드리죠."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의 원천은 과연 어디서 비롯됐을까?



■ 미국생활 3년 만에 업계가 주목하는 기린아로

4월1일 발행된 '광고천재 이제석(학고재)'의 저자인 이제석의 프로필은 20대 후반의 나이가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촘촘하다.

우선 화려한 수상경력. 2006년부터 2009년까지 단 3년 간 광고계 루키가 받을 수 있는 상은 싹쓸이 하다시피 했다. 세계 3대 광고제의 하나인 뉴욕 윈쇼 페스티벌(최우수상), 광고계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클리오 어워드(동상), 미국광고협회 애디 어워드(금상)를 비롯해 무려 50여개의 상을 수상한 것. 이런 수상이력은 광고시장의 메카인 뉴욕에서 그가 최대 광고회사만 골라서 옮겨 다닌 배경이기도 하다.

하지만 수상실적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빛나는 창작아이디어들이다. 그의 광고작품들은 시상식장에 머물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가며 "기발하다" "천재적이다" "이제석이 도대체 누구냐?"는 찬사를 불러 모았다.

국내에도 '이제석'이란 이름 석자는 해외 매체와 인터넷을 통해 알음알음으로 소개됐다.


#공익광고1. 장애인을 위한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지 않은 뉴욕지하철 계단. 계단 사이사이 '에베레스트' 사진을 잘라 붙여 넣는다. 계단 정면에 서면 거대한 산이 합쳐져 형상화 된다. 그리고 그 사이로 새겨진 문구. "누군가에게 이 계단은 에베레스트 산입니다"


#공익광고2. 뉴욕의 낡은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 연통을 따라 시선을 아래로 옮겨보니 권총의 총신으로 연결된다. 굴뚝총 아래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등장한다. "대기오염으로 한해 6만 명이 사망합니다."

뿌린대로 돌아온다(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을 뿐.) 이라크 전쟁을 멈춰야 합니다. 국제 평화협회 GOP 광고
뿌린대로 돌아온다(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을 뿐.) 이라크 전쟁을 멈춰야 합니다. 국제 평화협회 GOP 광고

#공익광고3. 병사가 총을 겨누고 있다. 탱크도 포신을 겨눈다. 총신은 길게 늘어뜨려져 있다. 그리고 이 포스터는 전봇대에 둥글게 붙여 놓는다. 그러면 그 총구가 다시 그 병사(탱크)의 뒤통수를 겨누게 된다. 그 아래는 '뿌린대로 거두리라'는 반전광고 문구.
■ 지방대 출신 '루저'가 단 1년 만에 '맨해튼 스타학생'으로

그러나 한국의 누리꾼들이 '이제석'을 주목한 이유는 정작 다른 데 있었다.

그가 지방대(계명대) 출신의 (우리 눈에는) 평범한 취업준비생에 불과했다는 것. 그것도 재학시절 수십 번 공모전에 출품했지만 단 한 개의 수상실적도 없이 취업에 실패한, 특출날 것 없는 인물이란 점에 주목한다. 이런 그가 미국으로 건너간 지 불과 1년 만에 9시뉴스에 '광고천재'로 소개될 정로도 전 세계 최고수들이 주목하는 루키로 거듭났다는 사실에 열광하는 것.

"어휴. 따지고 보면 제가 감사해야 할 분들은 나를 비웃고, 냉대했던 사람들이겠죠. 진심으로 이분들께 밥을 한번 사고 싶어요."

그의 성공스토리와 창의적인 아이디어 발상법 그리고 자신만의 광고에 대한 철학과 미래 비전에 대해서는 책에 비교적 자세히 설명돼 있다. 그가 책에서 못 다 밝힌 5가지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젊은 천재 광고인의 생각을 모아봤다.
#1 지방대의 설움?

- 대학재학시절 공모전에 열심이었나?

"물론이다. 한번 제출할 때 박스째로 낼 정도였으니…"

- 학과 수석 졸업생인데 그래도 취업정도는 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광고 회사에 지원은 해봤나?

"메이저에는 '감히' 지원하지 못했고, 일부 중견광고사만 내봤다. 하지만 소위 SKY출신도 취업 못하는 게 작금의 현실 아닌가? 한번은 서울 온 기념으로 이태원 S광고기획사 앞에서 친구들과 기념사진 찍었는데 경비가 달려와 쫓겨난 기억도 있다. 그만큼 비참한 시절이었다."

- 지방 출신이란 게 예술가로 성공하는데 핸디캡이 되진 않았나? 당신도 뉴욕으로 갔듯이 디자인 감각을 위해선 대도시에 가야 한다는 속설도 있는데…

"단정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자식이 생기면 서울에서 안 키운다. 내가 자란 경상도에서 키울 테다. 도시에서 배우는 것보다 자연에서 배우는 게 훨씬 많다. 자연이 최고의 학습 장소다. 압구정 혹은 청담동에서 이탈리아 최고의 장인이 만든 최고급 장난감을 보며 자라는 환경보다, 나무에 붙어 있는 딱정벌레에서 더 많은 아름다움을 배우는 게 세상의 진리다."

어떤 엄마들은 쇼핑하러 십리길을 찾아다니고, 어떤 엄마들은 마실물을 찾아 십리길을 찾아다닙니다.. 빈곤층과 부유층을 상대적으로 비교한 광고
어떤 엄마들은 쇼핑하러 십리길을 찾아다니고, 어떤 엄마들은 마실물을 찾아 십리길을 찾아다닙니다.. 빈곤층과 부유층을 상대적으로 비교한 광고


#2 학점과 영어

- 대학을 수석 졸업(GPA 4.47)하고 국밥집 광고 간판을 그리다가 2006년 9월에 뉴욕 '스쿨 오브 비주얼 아츠(SVA)'에 편입해 스타가 됐다. 왜 그렇게 학점에 집착했나?

"공부는 평생의 한이었다. 대학 때만큼은 학점을 잘 받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졸업할 무렵 전체적으로는 다 잘했지만 확실하게 내세울 재능이 없어 곤혹스러웠다. 시장에서 '튀는 인재'란 사실 학점보다는 기능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내겐 좋은 학점이 큰 도움이 됐다. 내가 광고회사 사장이라면 학점만 보고 뽑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다."

- 왜 그런가?

"사실 아트라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따지고 보면 A와 C는 실력 차이라기보다는 선생님 눈에 달렸다. 결국 교수가 원하는 정답을 말하는 게 좋은 학점의 첩경이다. 즉, 학점이란 커머셜(Commercial) 마인드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얘기다. 상업미술은 결국 남의 시선을 만족시켜야 하는 커뮤니케이션 활동이다. 난 학점을 위해 교수님의 성향과 나이 취미까지 고려해가며 과제를 만들었고 결국 그런 노력이 지금의 나를 성장시켰다고 생각한다."

- 흥미롭다. 영어는 어떤가? 어떻게 단 1년 만에 미국에서 영어로 경쟁할 실력이 됐나?

"말보다 그림이 앞서는 직업이다 보니 더 쉽게 된 것 같다(웃음). 무엇보다 살던 집이 대구 미군기지 근처라는 점이 큰 작용을 했던 것 같다. 어릴 적부터 워낙 다종다양한 인종을 만나고 살아서 외국인에 대한 겁이 없었다. 미국 유학을 결심하자마자 미군 장교 부인에게 미술을 가르쳐 주면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 노하우가 있다면?

"영어의 출발은 한마디로 듣기다. 미국에 가서도 수업을 들어야 하고, 듣기가 가능해야 대화도 가능하다. 짧은 시간 내에 듣기 쓰기 말하기 다 잘할 순 없어서, 무조건 듣기에 집중했다. 좋아하는 드라마 들릴 때까지 깡그리 암기하는 등 나름 효과적으로 공부한 게 미국에서 적응하는데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3. 공익광고

- 상업광고도 히트작이 많지만 대표작들은 공익광고가 많다. 돈 많이 벌어서 그런가? 왜 공익광고에 몰두하나?

"돈은 아니다. 생각보다 이 업계 보수가 짜다(웃음). 사실 돈 벌고 싶어 광고시작한 것도 아니다. 미국에 가서 4년간 밤낮없이 광고만 생각하고 살았다. 처음에는 광고를 잘 만들고 싶었고, 상도 타고 돈도 벌고 싶었다. 그런데 살다보니 인간 활동의 원천이 이윤추구라기 보다는 행복추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을 찾다보니 공익광고에 이른 것이다. 공익광고 분야 세계 최고의 권위자가 되고 싶다. 무덤 갈 때까지 이 분야를 파보고 싶다."

- 그런데 공익광고라는 시장이 있나?

"아니다. 그냥 광고의 일종이다. 근데 돈이 안 되니까 광고는 아닌 셈이다. 거의 모든 공익광고가 재능기부 형태로 공짜로 제작되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난 철저하게 상업적 마인드로 공익광고를 만든다. 우리 회사 슬로건이 '착한 일을 못되게 하자'다. 일할 때 최대한 '갈구면서' 한다.(웃음)"

- 그러니까 상업적 마인드의 공익광고를 만들겠다는 얘긴가?

"맞다. 나 같이 나쁜 사람이 공익광고를 만들어야 제대로 된 성과가 보인다. 생각보다 세상엔 나쁜 사람이 많다. 그들을 상대로 광고하려면 독하게 맘먹어야 한다. 분명히 해두지만 나는 그다지 착하지 않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이 더 많다. 그들을 설득하려면 나 같이 충분히 세속적이고 독한 사람이 공익광고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광고를 통해 정책을 바꾸고 싶고, 사람들의 행동방식 자체를 바꾸고 싶다. 그런데 여태까지 계몽적이고 교육적인 효과에만 집중된 것 같아 아쉽다."



#4. 스펙과 국가브랜드

- 미국에서 광고 생활을 하다보면 자연스레 한국의 국가 브랜드를 고민했을 텐데.

"물론이다. 아직도 한국의 브랜드는 희미하다."

- 정답이 있을까?

"김연아다. 그는 그 자체로 정답이다. 아직도 김치나 비빕밥 얘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진짜 한국의 브랜드가 아니다. 브랜드는 캐릭터고, 캐릭터는 영혼의 반영이다. 마땅한 예가 없었는데, 김연아가 좋은 사례가 됐다."

- 김연아? 동의는 하는데 어떤 면이 그런가?

"마오를 보자. 전형적인 일본 브랜드다. 섬세하고, 강렬하고, 작고 정교하다. 김연아?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갈수록 수선화 같은 매력을 뿜어낸다. 그녀가 올림픽 갈라쇼에서 입고 나온 밝은 회색 드레스 기억하는가? 나는 그 옷색깔을 보고 한마디로 뻑 갔다. 백의민족을 그렇게 세련되게 해석한 사례는 아직 없었다. 화려함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세련된 무채색의 마력. 수수함과 화려함이 동시에 들어가 있지 않았나?

중국은 크고 일본은 화려하고 섬세하다. 그런 김연아의 캐릭터가 실제 한국에 왔을 때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 아쉽다. 한국의 아름다움을 형상화한 전통가옥의 처마, 돌담길, 한복 거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 도대체 어디에서 김연아에게서 느낀 세련된 감수성을 찾을 수 있겠나?

- 공감한다. 이제 많은 이들이 김연아의 아름다움에 박수를 친다.

"천만에. 우리나라는 성공에 대해서만 박수를 쳐준다. 김연아가 금메달을 땄기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그게 스펙주의다. 난 스펙 안 본다. 김연아가 위대한 이유는 그녀가 그 어린 나이에 수많은 유혹을 물리치고, 자신의 그 무엇을, 김연아만의 무언가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성공했기 때문에 훌륭한 게 아니다. 그런 보석을 발견해내는 심미안이 과연 우리에게 있었을까?"

#5. 상업광고의 간판주의

- 한국의 상업광고는 어떻게 보나?

"지나치게 연예인과 노출의 빈도에만 의존한다. 아무리 나쁜 광고라도 노출 많이 하면 힘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절대 브랜드로 연결 안 된다. 브랜드는 정체성이다. 매력적인 정체성이다. 캐릭터가 희미한 것을 강렬하게 바꾸는 것, 나쁜 캐릭터를 좋게 바꾸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런 고민이 비치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삼성이나 LG만 해도 세계 최고 MBA 출신 인재들을 영입해 브랜드 마케팅을 벌이고 일정정도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왜 그럴까? 삼성을 대표로 삼아 말하자면 마치 한국이 처한 딜레마와 유사하다. 공부는 잘하는데, 인기가 없어 반장 역할은 할 수 없는 학생같은 이미지다(웃음). 그게 문제다. 머리만 비대하고 균형이 안 맞는다. 브랜드가 학벌 좋은 사람으로만 채워져 세워진다면 그걸 누가 못할까? 지덕체가 균형을 갖춰야 하고 밑바닥부터 최상층에 이르기까지 아이덴티티가 분명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매력 포인트가 잘 안 보인다."

- 앞으로 무엇을 할 예정인가? MBA라도 갈 작정인가?

"천만에. 학벌 하나 따느니, 길거리에서 수세미 한 장 파는 게 더 공부가 된다. 솔직히, 미국에서 보니 진짜 공부하러 MBA에 가는 사람은 1%도 안 돼 보이더라. 이젠 내가 사람 뽑아보니 더 잘 보인다. 대부분 자기의 이력을 설명할 때 학벌이나 전 직장의 명성만 나열하기 일쑤다. 그런데 무에서 유를 창조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냥 조직에 빌붙어 있었다는 거다. 그런 사람으로 가득 찬 조직이 발전할 리 없다."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 기획영상 = 이제석 “광고천재? 사실은 광고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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