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킷-물로 버틴 13시간 사투… ‘풍요의 여신’ 결국 품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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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28일 03시 00분


■ 본보 한우신 기자가 지켜본 ‘숨가빴던 도전 순간’


《‘철의 여인’을 깨운 건 새벽 공기의 상쾌함이 아니었다. 오은선은 27일 오전 1시 30분(한국 시간 오전 4시 45분·이하 현지 시간) 깨질 듯한 두통과 멈추지 않는 기침에 눈을 떴다. 이 순간 자신의 별명이 원망스러웠다. 별명처럼 그의 몸은 철을 두른 듯 무거웠다. 자신을 강한 여자로만 기억하는 주위의 시선이 야속했다. 텐트 문을 살짝 열자 영하 30도의 찬 바람이 눈가를 때렸다. 이내 정신이 들었다. ‘그래 나도 연약한 여자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다시 마음을 잡았다. 8시간 전 “컨디션이 조금 안 좋습니다. 일단 내일 시도는 해볼게요”라고 엄살을 떨었던 게 괜스레 후회가 됐다.

오전 1시 45분 오은선과 한국방송(KBS) 촬영팀 2명 그리고 셰르파 3명은 서로의 몸을 로프로 묶었다. 일명 안자일렌 방식. 함께 등반하는 데 유리하지만 한 명이 처지기라도 하면 모두 어그러질 수 있다. 땅보다는 구름과 가까워지고 나니 곁의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나 소중하다. 오은선은 좋지 않은 컨디션을 동료들에게 솔직히 얘기했다. 대원들은 별 말이 없다. 그저 웃어보였다.》
[오전 1시 45분 출발 <현지 시간>]
영하 30도에 두통-기침까지… 대원 6명 로프로 서로 묶어

[오전 7시 50분 7600m]
6개월전 발길 돌렸던 그곳… 연방 허리 숙이며 전진 전진

[오후 12시 30분 마지막 협곡]
강풍-안개에 한동안 주춤

[오후 3시 정상]
8091m 지점에 태극기 꽂아… “엄마 아빠가 가장 생각나요”


6명은 정상을 향한 발걸음을 한 발짝 한 발짝씩 옮겼다. 걸음 하나하나에 혼을 실었다. 강한 바람이 겨우내 쌓인 눈을 날려 버린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무릎까지 오는 눈길을 헤치며 와야 했던 어제(26일)에 비해선 한결 낫다. 오전 6시 50분 음지에서 양지로 들어섰다. 태양과 가까워져서일까. 햇빛은 베이스캠프(해발 4200m)에 있을 때보다 30분 일찍 여인을 맞아줬다. 태양이 외투에 붙은 눈을 녹여주니 몸이 한결 가벼웠다.

1시간 후 오은선 원정대는 7600m 지점에 다다랐다. 여기까지였다. 지난해 10월 오은선은 이곳까지 와서 발길을 돌렸다. 왼쪽 옆에 누운 바위가 어렴풋이 보인다. 눈에 익다. 오른쪽으로 펼쳐진 낭떠러지도 왠지 익숙하다. 하지만 더 생생한 건 반년 전 그날의 기억이었다. 그날 오은선은 강한 바람과 화이트 아웃(짙은 안개로 1m 앞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 발이 묶였다. 등반을 계속할지를 놓고 함께 정상을 향했던 다른 원정대와 의견이 갈렸다. 오은선은 단호했다. 그는 “안전하게 내려가는 게 중요하다”며 발길을 돌렸다.

6개월 전의 실패, 그리고 다시 찾고야 만 의지. 복잡한 심경을 간직한 그의 마음을 알았을까. ‘풍요의 여신’ 안나푸르나는 자신을 뚜렷이 보여줬다. 외길 끝 왼쪽에 자리한 봉우리는 주변의 그 어떤 봉우리도 자신보다 하늘과 가까운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바로 저기였다. 정상이 손에 잡힐 듯했다. 초속 13m의 바람은 세찼지만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경쟁자였던 스페인의 에두르네 파사반이 오를 때는 초속 5m였는데…. 하지만 조금이라도 여신의 마음을 노하게 할까 이내 원망을 접었다.

오은선은 정상에 가까워지니 연방 허리를 숙였다. 마치 안나푸르나 여신께 거듭 허락을 구하는 인사처럼 보였다. 사실 숨쉬려다 보니 절로 허리가 숙여진 때문이었다. 낮 12시 30분 드디어 정상을 향하는 마지막 구간이 시작되는 협곡에 도착했다. 만년설로 치장한 저곳을 지나 몇 발짝 옮기면 맨 꼭대기였다.

하지만 사투는 그때부터였다. 11시간 가까이 눈길을 걸으며 먹은 거라곤 비스킷과 사탕 두세 개 그리고 물이 전부였다. 전날도 10시간 넘게 걸어 지칠 대로 지친 상태. 반걸음을 떼기도 쉽지 않았다. 생과 사, 성공과 실패가 한 길에 섞였다. 그때 예보에도 없던 강풍과 짙은 안개가 오은선을 덮쳤다. 11시간 전 그때처럼 정신이 들었다. 44년을 기다리고 17년을 사랑했으며 13년을 꿈꾼 순간이 바로 앞에 있었다.

2시간 30분이 흐른 오후 3시(한국 시간 오후 6시 15분) 마침내 정상에 섰다. 거친 숨소리가 바람결에 휘날렸다. “정말 고맙습니다. 엄마, 아빠가 가장 생각납니다.” 우는 것 같기도 웃는 것 같기도 했다. 아기 같은 오은선의 목소리는 바람을 타고 곳곳으로 퍼졌다. 그는 두 손을 모아 연방 감사함을 표했다. 여성 최초 히말라야 14좌 완등의 주인공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베이스캠프를 떠난 지 128시간이 지났다. 차분했던 그의 목소리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변했다. 그 목소리는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그리고 보는 이의 숨마저 차오르게 만들었다. 풍요의 여신의 심장도 여느 때보다 세차게 뛰는지 바람 소리도 점점 커졌다.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새 생명의 탄생은 늘 울음소리와 함께 찾아오니까.

안나푸르나=한우신 기자 hanw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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