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의 열번째 장편영화 \'하하하\'에는 낄낄거리며 웃게하는 \'홍상수식 유머\'가 더욱 능글맞게 나타난다.
홍상수의 영화를 볼 때면 늘 '낄낄거리며' 웃게 된다. 대놓고 웃기지는 않은데 왠지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그래서 딱히 웃는 것도 아닌데 계속 은밀히 웃는 어정쩡한 상태가 되곤 한다.
홍상수의 열 번째 장편영화인 '하하하'에서는 이러한 홍상수식 유머가 더욱 풍부해지고 능글맞아졌다. 홍상수의 이전 작품들이 그만큼 더 어렸던 내가 보기에 불편하고 부끄럽고 재미있는 순이었다면, 이번 영화는 그만큼 더 나이를 먹어서 보기에 재미있고 부끄럽고 불편해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재미'는 어느 새 '불편함'을 뛰어넘어 홍상수 영화의 첫 번째 코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가 더 변한 건지, 내가 더 변한 건지는 확실치 않다.
▶ 홍상수식 남녀탐구생활
늘 그러하듯 이번 영화에도 여러 명의 남자와 여자가 등장한다. 영화감독인 문경(김상경 분)과 관광 해설자인 성옥(문소리)이 한 커플이고, 결혼은 했지만 애인과 함께 통영에 내려온 중식(유준상)과 애인 연주(예지원)가 또 다른 커플이다. 문경과 중식은 어느 여름의 끝자락 우연히 청계산에서 만나 막걸리를 마신다. 그리고 우연히 둘 다 얼마 전 통영에 갔다 온 사실을 알게 된다. 이들은 주거니 받거니 서로의 이야기를 한 토막씩 하기로 하는데, 각각 동떨어진 듯한 두 이야기는 어느 새 정호(김강우)라는 또 다른 인물에서 겹치게 된다. '알고 보니 그 놈이 그 놈이더라'는 식의 주인공이 된 정호는 바로 문경이 좋아하는 성옥의 남자친구이자, 중식의 절친한 후배이다.
그리고 홍상수 감독의 끝없는 남녀생활 탐구가 시작된다. 문경은 고향인 통영에 갔다가 관광해설을 하고 있는 성옥의 뒷모습을 처음 마주치고 느닷없이 그녀의 종아리에 반해버린다. 다소 우스꽝스러운 사투리와 몸짓을 가진 성옥이지만, 그리고 '사실 얼굴은 별로'인 그녀지만지만, 그녀의 종아리와 날씬한 뒷모습은 이미 문경의 마음에 꽂혔다. 남자 친구 정호가 있는 것을 알게 됐지만 개의치 않는다. 골키퍼가 있으면 그 골키퍼를 반칙으로 퇴장시킬 수도 있는 것이 바로 홍상수식 연애법. 문경은 정호가 다른 여자와 여관에 들어가자 성옥에게 전화를 걸어 현장에 불러낸다(하하하!). 1차 게임 셋이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판타지적 로맨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하하'에서는 이전 작품들에서 보여졌던 남녀관계의 불안정성과 날카로움이 관조적 태도와 여유로움으로 대체됐다.
다음은 중식. 술 먹고 노는 와중에 뜬금없이 우울증 약을 꺼내 먹고, 후배 정호가 쓴 시에 대고 실존주의에 함몰되어 있다며 버럭버럭 성질을 부리는 것이 어이없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럽다. 게다가 뻔히 보이는데도 애인을 그냥 아는 사람이라고 둘러대는 소심함까지 더하면 대한민국 대표 진상 자리는 떼어 놓은 당상이다.
그리고 정호. 시를 쓰러 통영에 내려왔다. 성옥과 사귀고 있지만 자기를 좋아해 주는 정화(김규리)도 굳이 뿌리치지 않는다. 화가 나면 사람을 때리기도 하고 성옥의 대문 앞을 서성이며 안절부절못하는 찌질한 모습이 대부분이지만, 시인이라는 직업을 잊지 않으려는 듯 '저 거지가 왜 거지로 보이느냐'는 철학적인 질문에 집요하게 집착하기도 한다.
그리고 문경과 중식과 정호의 그녀들인 성옥, 연주, 그리고 정화는 이 남자들을 중심으로 얽히고설킨다. 성옥은 정호의 여자친구이자 문경의 구애의 대상이고, 연주는 중식의 연인으로 정호를 좋아하는 정화와 만나게 된다. 그리고 정화는 문경의 어머니가 하는 복국집에 양녀로 살고 있으면서 정호를 따라다닌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여자들은 항상 이야기의 주체가 아니라 탐구의 대상인데, 이번 영화에서도 그 위치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
이 글을 쓰다가도 언뜻 헷갈렸을 만큼 이전 작품들에 비교해 등장인물들의 관계는 더욱 복잡해졌다. 그러나 이 복잡한 관계를 잇고 풀어나가는 감독의 정교함도 한 수 깊어졌다. 서로 연관이 없는 듯 하다가도 묘하게 얽히고 이어지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한치 앞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비슷한 소재와 비슷한 구성과 비슷한 기법으로 만들어온 홍상수의 작품이 매번 다른 맛의 아이스크림을 조금씩 조합해 먹는 것처럼(아, 다른 종류의 술이라고 써야 하나!) 야금야금 색다른 재미를 주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대충 섞은 것 같은데 일부러 신경 쓴 것처럼 맛있는, 잡히지 않을 것 같았는데 결국엔 잡히는 그런 느낌을 감독은 특유의 정교한 스토리 전개를 통해 선사하고 있다.
▶ 섹스는 사랑의 결과가 아닌 시작
동시에 남녀관계에 대한 통찰은 더 푸근해지고 해학적이 되었다. 그들의 사랑은 여전히 에로스적이고 저돌적이며, 섹스는 사랑의 과정이나 결과라기보다는 시작이 된다. 하지만 남자들은 더 단순하고 과격해졌고, 때로는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어리광을 부리기도 한다. 남자들에 비해 여자들은 조금 더 쿨해진듯 하지만, 그 뒤에 감춰진 속물근성을 드러내는 것도 더욱 순식간이다. 이전 작품의 남녀에게서 언뜻언뜻 비치던 불안정성과 날카로움은, 관조적인 태도와 여유로움으로 대체되었다.
사실 홍상수의 영화에 대한 나의 불편함은 (그리고 아마도 대부분의 관객 역시 그럴 것이라고 추정하는) 이런 데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의 영화는 생활의 한 단면을 툭 잘라다 놓은 것처럼 사실적이기 그지없고 인물들은 조금씩 과장되어 있거나 격앙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행동에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영화 속에서만이라도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은 늘 가차 없이 배신당했고, 이러한 배신감 역시 불편함을 가중시켰다. 남녀 사이의 관계에 가슴 설레는 로맨스나 판타지는 홍상수가 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홍상수의 페르소나를 넘어 아바타가 된 듯한 김상경과 문소리의 능청스러운 연기에도 주목해볼만 하다.
그리고 이는 감독 자신 역시 많이 들었던 이야기인 듯 하다. 그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라는 전작에서 이에 대한 질문과 답을 스스로 주고받은 적이 있다. 극 중 영화감독에게 한 관객은 유독 '감독님은 이렇게 관객이 이해하지 못하는 영화를 왜 만드세요?' 라며 집요하게 묻고, 우연히 만난 영화 기자는 '감독님의 영화가 아니었음 못 이해했을 그런 인간들이 있었을 겁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사랑의 방식은 점점 편해지고 재미있어졌다. 이전의 작품들이 술기운을 빌려 거북한 진실을 슬금슬금 드러내는 느낌이었다면, 그의 최근작들은 치장 없이 담백하게 진실을 터놓는 느낌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하하하'에 이르러서는 이 솔직함과 뻔뻔함이 낄낄거리던 웃음을 활짝 터뜨리는 폭소로 만들 정도로 밝아졌다.
이 긍정적인 변화에 대해서는, 감독이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을 인용해보고자 한다. "어릴 적 신 김치 좋아하다가 나이 들면 덜 익은 김치 좋아하게 되는 것처럼 몸이 변하는 거니까 왜 그런지는 모르죠. 느낌이 달라지는 것 같은 거니까."
▶ 홍상수의 '아바타'가 된 김상경
영화 후반부, 앞서 고자질로 1차 게임을 이겼던 문경은 성옥을 어머니에게 소개시키려 한다. 성옥은 그제서야 자신이 정호와 함께 어울려 술을 마신 복국집 주인이 문경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잠시 고민하던 성옥은 결국 문경과 헤어지기로 결심하는데, 이것이 이 영화의 전개상 '위기' 쯤 된다. 이는 두 이야기를 병렬적으로 나열하는 것으로 유명한 홍상수 영화에서, 내가 기억하는 한 가장 드라마틱한 갈등의 절정이다.
결말은 없다. 뚝 잘려 나온 생활의 단면은 다음 생활로 이어질 뿐이다. 문경은 다시 서울로 올라가고, 이후 그의 행보는 영화의 시작과 맞닿아있다. 중식은 연주와 여수로 떠나는데, 그의 이후 행보 역시 영화의 시작으로 연결된다. 성옥은 바람피우는 현장을 자기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던 정호에게 슬쩍 다시 전화를 건다. 역시, 홍상수는 낭만적 사랑에 대한 지독한 불신자다.
홍상수 감독은 현장에서 많은 것을 이끌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하하'의 경우 80% 이상을 촬영하면서 생각해 냈다고 한다. 배우들이 미리 준비한 연기로 굳어질 틈을 주지 않고 현장에서 감독과 함께 호흡하도록 하기 위해서인데, 덕분에 배우들은 냇물이 흘러 강이 되듯 유기적으로 영화와 어울린다. 특히 홍상수의 페르소나를 넘어서 아예 아바타가 된 듯한 김상경의 능청스런 말투와 문소리의 감칠맛 나는 연기는 단연 일품이다.
'하하하'는 제목처럼 대놓고 웃을 수 있는 홍상수 감독의 가장 후덕하고 유쾌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예술 감독은 좀 더 대중적인 사랑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나는, 이것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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