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커버스토리]가족 이데올로기의 전복, ‘하녀’의 위대하고 불편한 도발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5월 6일 15시 00분


● '지긋지긋한 가족 이데올로기'에 메스를● 기득권, 지식인의 모순 적나라하게 드러내● 사회적 규범 흔드는 임상수는 진정한 '좌파'

임상수 감독의 새 영화 '하녀'는 고인이 된 김기영 감독의 동명 작품을 리메이크 했다고 알려졌다. 1960년에 만들어진 원작은 서울의 어느 가정에 식모로 들어 온 하녀에 관한 영화다. 아니, 하녀의 이야기라기보다는 하녀를 둔 주인집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 동식은 방직공장의 음악 선생으로 일하고 있다. 당시 방직 공장에는 한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거나 돈벌이를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처녀들이 가득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음악 선생 동식은 그런 처녀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자 유혹의 대상이다.

흥미로운 것은 주인공 동식이 이상하리만치 방직공장 여직원들의 흠모에 냉정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동식은 자신에게 연서를 보낸 여직원을 해고당하게 한다. 그는 도덕적이라기 보다는 지나치게 염결(廉潔)적인 인물로 보인다.

▶ 김기영 감독이 그린 1960년대의 '하녀'

1960년대 고 김기영 감독이 연출한 '하녀'와 임상수 감독의  2010년 버전 '하녀'는 변화한 시대적 배경만큼이나 다른 영화다. 사진제공 한국영상자료원 ☞ 사진 더 보기
1960년대 고 김기영 감독이 연출한 '하녀'와 임상수 감독의 2010년 버전 '하녀'는 변화한 시대적 배경만큼이나 다른 영화다. 사진제공 한국영상자료원 ☞ 사진 더 보기

그런데 그런 동식이 아내가 집을 비운 사이에 집에서 일하는 식모와 육체적 관계를 갖는다. 순진하다 못해 백치 같은 하녀는 동식의 아이까지 갖게 된다. 이제 하녀는 이 집의 주인행세를 하며 집안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든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부인은 하녀의 아이를 유산시키고 이에 하녀는 광기 어린 행동을 하게 된다.

동식의 집으로 묘사된 이층집은 당시 꽤 잘사는 중산층 가정을 그린 것이다. 비록 아내가 끊임없이 삯바느질을 해야 하지만 피아노가 있는 이층집에 식모를 데리고 살 수 있다는 것은 당시 충분히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공간이었다. 김기영은 이 구조를 통해 산업화가 시작되던 무렵의 풍경을 그려내고 한편으로는 도덕적 양가 심리 앞에 노출된 한 남자의 심리적 욕망을 그려냈다.

자신을 향한 연서에 지나치게 염결했던 그 남자가 어떻게 하녀와 육체적 관계를 갖게 될까. 그리고 이 욕망이 어떤 비극을 불러오는가. 영화는 이 도미노를 복잡한 심리적 갈등과 괴기스러운 미장센으로 구체화해주었다.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귀기가 영화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던 셈이다.

그런 점에서 엄밀히 말하자면 임상수의 '하녀'는 김기영 감독의 '하녀'를 리메이크했다기 보다는 소재를 차용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옳을 듯싶다. 백치같은 하녀와 그녀의 고용주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사실, 이 영화의 시작과 끝이 김기영 감독의 전작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 임상수의 2010년형 하녀…불편한 대저택의 피라미드

현대 한국의 위선적인 가족 이데올로기를 뒤집는 임상수 감독의 '하녀'. 주인공들의 관계와 영화의 무대가 되는 부잣집 저택은 아슬아슬하고 위태롭기만 하다. 사진제공 올댓시네마. ☞ 사진 더 보기
현대 한국의 위선적인 가족 이데올로기를 뒤집는 임상수 감독의 '하녀'. 주인공들의 관계와 영화의 무대가 되는 부잣집 저택은 아슬아슬하고 위태롭기만 하다. 사진제공 올댓시네마. ☞ 사진 더 보기

1960년대 하녀는 식모라는 이름으로 서울의 웬만큼 사는 집에선 흔히 고용하던 일종의 직업명이었다. 시골을 떠나 서울로 온 처녀들의 상당수는 공장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며 일하거나 여느 집안의 식모가 돼 숙식을 해결했다. 한 입을 더는 것이 곧 돈을 벌어다주는 일이었던 시절, 아들이 아닌데다 과년해진 딸들은 상급 학교가 아닌 누구누구네 집으로 식모살이를 떠났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2010년의 대한민국에서 어떤 사람들이 집안에 '하녀'를 두고 살까. 식모라는 말을 대신하게 된 입주도우미들은 이제 더 이상 십대 소녀들도, 시골을 떠나 온 가난한 집 맏딸들도 아니다. 임상수 감독은 21세기에 하녀를 집에 두고 사는 집을 바로 최상위 1% 계층의 삶으로 그려낸다. 1960년대 산업화가 시작될 무렵의 괴기스러운 예감이 김기영의 '하녀'에 독특한 아우라를 제공한다면 임상수의 '하녀'는 지금, 이 곳 2010년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여주려 했다.

임상수의 '하녀'는 엉뚱하게도 대도시의 어느 유흥가를 비추면서 시작한다. 어떤 사람은 회를 뜨고, 어떤 사람은 수육을 썰고, 어떤 10대들은 모여서 담배를 피우고, 어떤 20대 여자는 통유리 창 앞에 서있다. 그 때 얼핏 한 여자의 모습이 지나쳐 간다. 그녀는 높은 곳에 위태롭게 서 있다. 여주인공 전도연의 모습도 비친다. 그녀는 위생모와 고무장갑을 끼고 분주히 배달을 가는 듯 한 모습이다. 갑자기 위태롭게 서 있던 여자가 투신한다. 그녀, 은이(전도연)도 사람들 사이에 끼어 추락을 지켜본다.

임상수 감독의 전작을 보았던 관객이라면 이 장면에서 일종의 기시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사고 처리 과정에서 스퀴드 마크처럼 남겨진 추락한 여자의 흔적은 '오래된 정원'에 등장한 분신 대학생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장면이 '하녀'속에서도 어떤 복선이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다만 무엇인가 수상하게 시작한다는 짐작을 했을 뿐이다. 세상에 가진 것이라고는 몸밖에 없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끽소리'라도 낼 수 있는 복수가 어떤 것일지 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촬영 단계부터 화제가 됐던 700여평 규모의 궁전 같은 집은 사람이 살고 있는 훈훈한 공간이라기보다는 인공적이며 기괴하다. 이 집은 무대 위의 세트처럼 낯설게 일상과 멀리 떨어진 곳에 존재한다. 사실, 이 집은 누군가가 살고 있는 집이 아니라 이 시대의 알레고리로 보여진다. 베토벤의 발트슈타인이 울려 퍼지고, 쌍둥이를 임신한 지나치게 젊은 사모님이 순산을 위해 매일 요가를 연습하는 집. 큰 하녀, 작은 하녀가 각기 서로 다른 자기의 임무를 다하는 공간, 그 공간은 분명 우리가 보고, 들었던 일상의 공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 집의 주인인 훈(이정재)은 최상위 계층의 남성으로 등장한다. 훈과 그의 가족들은 액세서리처럼 교양과 예의를 갖추려 한다. 오성급 호텔의 조식서비스처럼 완벽하게 준비되는 아침 식사는 이들의 삶이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 지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까다로운 취향과 품격이 사실상 위선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나이 든 하녀 병식이 말하듯 훈의 가족들은 돈이라면 뭐든지 해결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안위가 세상의 그 무엇보다 더 소중하다는 가족 이기주의를 집안의 이데올로기로 지니고 있다. 이 이데올로기의 가장 꼭대기에는 말할 필요 없이 가부장 훈이 있다.

훈은 아내를 사랑하고, 고용인들을 존중하는 것 같지만, 말없이 젊은 하녀의 방에 침입해 그녀에게 사정을 하는 대가로 돈을 지불한다. 훈은 말 그대로 젊은 도우미를 아랫사람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소유물처럼 대한다. 하루 밤의 대가를 돈으로 지불함으로써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훈. 하지만 문제는, 지불하지 않은 다른 결과가 발생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젊은 하녀, 은이가 아이를 갖게 된 것이다.

영화 속에서 하녀, 은이는 착하고 단순하며 게다가 순진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녀는 자신이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 조차 모르고, 그 사실이 어떤 식으로 훈의 아내에게 알려졌을 지도 전혀 예상치 못한다. 은이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자 훈의 장모는 이 일을 처리하기 위해 파렴치한 짓들을 아무렇지 않게 감행한다. 사위의 또 다른 아이가 생긴다는 것은 혹시나 있을 재산의 유출 가능성이기도 하고, 복잡한 상속 문제의 씨앗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은이가 나미에게 읽어주는 동화의 내용은 그런 점에서 흥미로운 복선이 되어준다. 동화의 내용은 이렇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영혼이라도 팔겠다는 엄마의 모정. 장모의 범죄와 부조리한 선택들은 '딸을 위해서'라는 모정으로 치장된다. 이 지긋지긋한 가족 이데올로기, 하녀근성, 임상수의 삐딱한 시선은 여기서 더 예리한 칼날을 준비한다.

세상이 조금쯤 달라지길 바란다면, 이 복잡하고 지리멸렬한 자본주의 세계의 욕망에 조금이라도 고장을 내고 싶다면 바로 가족, 당신의 너무도 소중한 가족만이 최고라는 생각을 버릴 것, 그는 이런 주문을 건네고 있는 셈이다.

▶ 삐딱하게 뜯어보는 가족 이데올로기

그렇게 보자면 훈의 집에는 병식과 은이라는 하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얼핏 보기에 피라미드 구조의 가장 위에 있는 것 같지만 훈의 아내 역시 훈의 첫 번째 하녀와 다를 바 없다.

아내는 남편의 사회적 지위와 부에 무임승차하고 자신이 낳은 아이에게 그것을 상속시키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딸을 위한다며 미필적 고의에 의한 낙태를 고안하는 장모 역시 훈의 하녀에 불과하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사위가 장모를 불러 "도대체 나의 핏줄에 무슨 못된 짓을 한거냐"며 따지고 들 수 있을까? 그리고 또 "당신 딸에게서만 낳아야 내 자식입니까"라고 물을 수 있을까?

이 피라미드 구조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바로 고참 도우미 병식(윤여정)이다. 그녀는 이 집안에서 일어나는 불온한 모든 일들을 눈치 채고 밀고하기도 하고 음모를 모르는 척 눈감기도 한다. 그녀의 계급은 하녀이지만 어느 새 귀족의 삶 한 귀퉁이에 익숙해져 있다.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는 훈의 가족을 경멸하지만 그녀 역시도 절실한 순간 그 방법을 벤치마킹한다.

고참 도우미 병식(윤여정 분)의 ‘양다리적’ 행각은 겉으로만 꽤나 정의로운 척 하는 우리시대 지식인의 모습과 닮았다. 사진제공 올댓시네마. ☞ 사진 더 보기
고참 도우미 병식(윤여정 분)의 ‘양다리적’ 행각은 겉으로만 꽤나 정의로운 척 하는 우리시대 지식인의 모습과 닮았다. 사진제공 올댓시네마. ☞ 사진 더 보기

사실상 은이 자신도 모르는 임신 사실을 눈치 채 나미의 외할머니에게 밀고하는 자도 병식이며 복수하려는 은이를 위해 대문을 열어 주는 자도 병식이다. 그는 훈의 가족과 은이 사이를 오가며 양심과 이익 두 가지 모두를 챙기려 한다.

'아래 계층'인 은이에게 동질감을 느끼지만 훈이에게서 얻을 이익을 포기하지도 못한다. 말로만 좋은 중간자적 입장, 병식의 모습은 지식인의 변명을 연상케 한다. 알면 말이나 말지 꽤나 정의로운 척 하는 그녀는 우리시대 지식인의 모습과 꼭 닮아 있다.

아이를 빼앗는 훈의 가족들 앞에서 은이는 복수를 선택한다. 그런데 그 복수는 너무도 '강렬하고도 허약해' 보는 자들을 먹먹하게 만든다. 은이의 '찍소리'가 울려 퍼지기에는 훈의 700평 저택은 너무나 견고하다. 1920년대 신경향파 작가들이 불을 질러 세상을 전복하고자 했는데 2010년의 훈의 저택은 스프링쿨러 때문에 불도 나지 않는다. 한 세기가 흐르는 동안, 훈의 집은 더욱 더 견고해졌다.

임상수 감독은 이 견고한 가족의 성을 비틀어 보여줌으로써 한국 사회의 고질적 질병인 가족 이데올로기를 내파한다. '처녀들의 저녁식사' '바람난 가족'에서 그랬던 것처럼 임상수는 이 견고한 집을 부수는 첫 번째 기폭제가 바로 가족 이데올로기의 전복이라고 설파한다. 설파의 힘은 자본의 힘으로 작동되는 21세기의 모든 시공간에 대한 격렬한 공격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임상수는 진정한 '좌파'다. 정치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사회적 규범적 측면에서 보수적, 안정적 질서를 완전히 타파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몸으로 복수해야 하는 은이의 뼈아픈 현실은 관객을 몰입하게 한다. 이제 생물학적으로도 누군가의 엄마가 된 전도연이라는 배우의 힘을 최대한으로 증폭시킨 임상수의 힘. 이 둘의 앙상블도 놀랍다. 임상수의 '뼈 속까지 삐딱함'에 박수를 보낸다.

강유정 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




▲ 동영상 = 논란 속 ‘하녀’ 도대체 어떻길래…예고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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