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 광풍에 사로잡혔던 1970년대가 지금 우리가 사는 2000년대와 별로 다르지 않음을 형상화한 SBS 대하드라마 '자이언트'(장영철·정경순 극본, 유인식 연출)의 도입부는 문제의 땅 강남이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 과정의 출발점을 극적으로 구성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도입부의 여러 에피소드들은 상투적이고 진부한, 그래서 어디에선가 한 번쯤 본 듯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참신하지 않다는 한계를 드러냈다. 가난 따위는 노동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정의로운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 아버지를 대신해 자식들을 건사하겠다며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던 어머니의 연탄가스중독사, 그로 인해 불행 앞에 무방비상태로 내던져진 형제들의 비극적인 운명은 시청자의 눈물샘을 자극하기 위한 통속적 설정이다.
▶ 대하드라마의 힘, 통속성
그런데 SBS가 창사 20주년을 기념해 야심차게 준비한 대하드라마 '자이언트'가 새롭고 재미있는 드라마를 갈구하는 시청자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 것은 통속성보다는 상투성에서 잘못을 찾아야 한다.
드라마에서의 통속성은 시청자와 소통하는 중요한 극적 요소가 될 수도 있다. '자이언트'의 기획 의도인, '사랑과 복수, 용서와 화합'은 이미 수많은 대하드라마에서 강조했던 주제의식이다. '통속'의 사전적 의미는 '세상에 널리 통하는 일반적인 풍속'이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드라마가 통속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감당할 수 없는 비극적 운명의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을 복수심으로 자신을 단련시키는, 그리고 마침내 원수를 갚으면서 권선징악을 온 몸으로 실천하는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운 대하드라마가 시대를 달리해 지속적으로 안방극장을 찾아올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특정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사람들의 생애나 가족사를 극적으로 형상화한 대하드라마가 불특정 다수의 시청자들과 공감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통속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통속성을 너무 쉽게 대중의 저급한 취향으로 폄하할 필요가 없다. 통속성은 거칠고 험한 세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인간의 본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 돈과 권력의 일반명사로 자리 잡은 '강남'을 향한 지금 우리들의 욕망 자체가 통속적이기도 하다. '자이언트'의 통속성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폄하 대상이 되서는 곤란하다는 뜻이다.
▶ 도식적인 상투성은 경계해야
문제는 통속적인 요소를 사회적 배경과 시대적 흐름에 맞게 적절히 변주하지 못할 경우, 아무리 참신한 소재의 드라마라 하더라도 상투적이고 도식적인 틀에 갇힐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구성의 규모가 크고 사건이 중첩되면서 다수의 에피소드가 동등하게 전개되는 대하드라마의 경우, 등장인물의 정형성과 이야기 구조의 진부함이라는 상투성의 늪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돈과 권력, 그 비정한 먹이사슬을 통해 경제개발의 빛과 어둠을 성찰하겠다'는 기획 의도를 강조한 '자이언트'의 도입부가 문제가 되는 것도 비극적인 가족사에서 비롯하는 통속성이 아니라 이미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 때문이라는 뜻이다.
부패나 비리와 타협하지 않고 정의를 강조하던 아버지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게 쫓기는 과정에서 생이별을 한 형제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복수를 계획하는 구도는 2008년 8월부터 2009년 3월까지 방영된 MBC 창사특집드라마 '에덴의 동쪽'의 도입부와 대단히 유사하다. 이런 상투적인 전개는 드라마의 신선도를 떨어뜨린다.
드라마의 상투성은 등장인물의 정형성과 이야기 구조의 도식성과 직결되어 있다. 도입부의 상투성을 탈피하지 못한다면, '자이언트'가 시청자와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틀에 박힌 등장인물과 예측 가능한 이야기 구조로는 제 아무리 기획 의도가 좋아도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 1970년대 역사, 사회의식 드러내는 드라마되길
제작진의 의도가 어떠하든 간에, '자이언트'는 '남서울 개발 계획'으로 명명된 강남 개발의 목적이 당시 권력 실세의 정치자금 확보에 있었다는 점과 개발 과정에서 발생한 부정부패와 비리의 실상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구조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사랑과 복수의 대서사시'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돈과 권력, 그 비정한 먹이사슬에 얽힌 갈등과 대립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이언트'가 아무리 '약육강식의 밀림에서 오로지 지혜와 용기로 승리해가는 한 인물의 성공담을 통해 개발 일변도와 욕망의 질주로 점철된 강남 개발사'를 강조한다 하더라도 시청자가 경제 개발의 '빛'과 '어둠' 가운데 어느 쪽에 주목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또한 1970년대 근대화·산업화 논리에 밀려 억압되었던 민주화를 향한 열망의 몸짓을 배제해서도 곤란하다. 만약 앞으로의 이야기 전개 과정에서 근대화·산업화 논리만 도드라진다면, 토건 중심의 개발 논리를 홍보하기 위한 드라마라는 비판을 확대재생산하게 될 것이다.
50부를 향한 첫 걸음을 시작한 지금, '자이언트'가 도입부의 상투성에서 벗어나 '권력이 개발을 주도한 강남'을 향한 욕망의 실체를 극적으로 형상화해 성공하는 드라마가 되기를 바란다.
특히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던 강남 개발 시대를 배경으로 한 만큼 1970년대를 살아간 세대들의 아픈 기억을 치유함은 물론 2000년대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들이 부동산 광풍에 신음하는 모습을 돌아보게 만드는 드라마가 되기 바라는 마음도 간절하다. 거대한 통속의 서사를 전면에 내세운 대하드라마 '자이언트'의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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