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 <트랜스크리틱>성인판 ‘백조의 호수’?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5월 27일 17시 25분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공연 장면. 백조 의상을 입은 남성 무용수들이 춤을 추고 있다.(사진제공=LG아트센터)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공연 장면. 백조 의상을 입은 남성 무용수들이 춤을 추고 있다.(사진제공=LG아트센터)

발레 '백조의 호수'가 동화라면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는 성인소설입니다. 이는 백조를 남성으로 표현한 본의 '백조의 호수'가 동성애코드를 깔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발레보다 훨씬 깊이 있는 예술적 성취를 이뤄낸 동시에 20세기를 살던 영국인의 동시대적 감수성을 보편화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3가지 측면에서 그러합니다.

첫째, 형식적으로 고전발레의 문법을 철저히 뒤집는데 성공했습니다. 본의 '백조의 호수'는 단지 백조를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꾸는 '깜짝쇼'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예로부터 우아함을 상징하는 백조의 숨은 야성을 매우 사실적 춤사위로 포착합니다. 발동작 중심의 발레문법을 벗어나 손동작 중심의 자유로운 현대무용으로 그것을 풀어냅니다. 그 결과 발레 '백조의 호수'보다 본의 '백조의 호수'가 더 백조의 본모습에 가깝습니다. 환상에 대한 사실의 승리입니다.

형식과 기교 중심의 고전발레에 대한 풍자와 전복은 이 작품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정통 발레 춤사위는 극중극의 여왕과 왕자가 발레공연을 감상할 때만 등장하는데 이를 과장된 동작으로 희화화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거의 그대로 쓰면서 전형적 발레무보를 파괴한 점도 도발적입니다. 발레에선 절정의 춤사위가 등장하는 '정경'의 멜로디가 흐르는 장면에서 의도적으로 춤을 빼고 심리적 드라마 전개에 충실합니다. 그러다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정경'에서만 폭발적 춤사위를 펼쳐냅니다.

전통 발레를 풍자한 장면 (사진제공=LG아트센터)
전통 발레를 풍자한 장면 (사진제공=LG아트센터)


둘째, 형식의 전복에만 머물지 않고 내용의 전복에도 성공했습니다. 마법사의 마수에 걸린 가녀린 오데트 공주의 비극적 사랑이라는 환상적 동화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현대 젊은이의 비극적 심리드라마로 거의 완벽하게 환치했습니다. 본은 마법이란 전근대적 서사기법을 정신분석학이란 근대적 서사기법으로 기막히게 바꿔칩니다. 또 다시 환상에 대한 사실의 승리입니다.

주인공 왕자는 아버지는 부재한 가운데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랍니다. 그 애정결핍을 백치미가 줄줄 흐르는 금발미녀의 품속에서 보상받고자 하다 영혼의 상처를 입은 왕자가 호숫가에 가서 자살기도를 하려다 한 무리의 백조 떼를 만납니다. 그 백조는 엄마의 치마폭에서 자란 왕자가 경험해보지 못한 강렬한 남성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상체를 드러낸 채 땀을 흘리며 높이 비상하는 백조의 군무는 남성미를 찬양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정신세계를 형상화합니다. 제우스신이 레다를 유혹할 때 백조로 변신했다는 그리스신화가 고스란히 오버랩 됩니다.(1막)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왕자. (사진제공=LG아트센터)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왕자. (사진제공=LG아트센터)


왕자는 그 벅찬 경험과 감동을 안고 궁궐로 돌아갑니다. 궁궐에선 왕자의 배필을 찾기 위한 무도회가 열리는데 왕자가 호숫가에서 만났던 백조를 닮은 매력적 사내(흑조)가 나타나 무도회장의 뭇 여성들을 현혹합니다. 왕자는 그에게 강한 호감을 표현하지만 남자는 이를 걷어차고 왕자의 열등감의 원천인 여왕을 유혹합니다. 여왕과 남자 사이에서 사랑의 미아가 된 왕자는 이성을 상실한 상태에서 여왕에게 권총을 겨눴다가 결국 정신병원에 감금당하는 신세가 됩니다. 그런 왕자의 꿈속에 다시 백조 떼가 찾아듭니다. 그들은 못난이처럼 굴었던 왕자를 사납게 공격하고 호숫가에서 처음 만났던 백조/흑조만이 홀로 왕자를 지켜주다 쓰러집니다. 그와 함께 왕자도 숨을 거두고 여왕은 싸늘한 시체가 된 왕자를 안고 오열합니다.(2막)

침실에 누워있는 왕자를 공격하는 백조들. (사진제공=LG아트센터)
침실에 누워있는 왕자를 공격하는 백조들. (사진제공=LG아트센터)


많은 분들은 흑조와 여왕 사이에서 애정결핍을 느끼는 왕자의 모습을 보면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것입니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이론 중 가장 유명하면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입니다. 모든 남자에게는 어린 시절 엄마에 대한 성적 욕망과 이를 좌절시키는 아빠에 대한 증오가 무의식적으로 각인된다는 이론입니다. 이에 따르면 작품 속 흑조는 분명 왕자의 성적 욕망을 좌절시키는 아빠의 대체물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왕자에게 삶의 의욕을 안겨준 백조와 그 삶의 의욕을 앗아간 흑조가 동일한 존재라는 점을 의아하게 여기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이 난제를 보다 풍성한 해석으로 돌파한 라캉을 따라가다 보면 이 수수께끼도 자연스럽게 풀립니다. 라캉은 프로이트가 이 이론에 단단히 씌워놨던 유아성욕의 사슬을 살짝 늦춰줍니다. 대신 엄마 중심으로 돌아가던 아이의 내면에 이성과 질서가 지배하는 논리적 현실세계(상징계)로 편입되는데 필요한 심리적 못걸이를 만드는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엄마-나 간에 형성된 이원적 세계에서 아이는 자연적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러다 아빠란 이질적 존재가 그 사이로 다소 난폭하게 틈입해 엄마-아빠-나의 삼각구도를 형성하면서 자신을 객관적 존재로 인식하는 자아가 형성되고 욕망을 억압할 줄 아는 문화적 존재로 거듭 나게 됩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통해 아이는 자연과 문화의 분리라는 아픔을 겪지만 그 상처를 통해 비로소 자아라는 옷을 걸칠 수 있는 내면의 못걸이를 마련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왕을 유혹하는 흑조. (사진제공=LG아트센터)
여왕을 유혹하는 흑조. (사진제공=LG아트센터)


자, 이 이론 틀을 갖고 작품으로 다시 돌아가면 백조와 흑조가 왜 동일한 존재인지가 명확해집니다. 백조는 왕자에게 결핍된 남성의 세계를 펼쳐 보여줌으로써 문화적 존재 또는 사회적 존재로서 다시 태어나게 해줍니다. 하지만 그것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었던 엄마의 상실이란 지독한 아픔을 대동합니다. 흑조는 그런 고통을 심어주는 백조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문제는 왕자가 그 엄마의 사랑을 한번도 온전히 누려본 적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비유컨대 못은 마련이 됐는데 그것을 박을 벽이 허술한 상태라고 할까요. 바로 이 때문에 왕자의 총구는 흑조를 향하지 않고 여왕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처럼 정신분석학적으로 탄탄한 극의 구조는 다시 사회적 맥락과 접합돼 풍성한 해석을 낳습니다. 작품 속 여왕과 왕자는 현실 속 엘리자베스 여왕과 찰스 왕세자를 연상시킵니다. 사회적 위신을 중시하는 강한 엄마와 그 치마폭에서 유약하게 자란 마마보이. 그 마마보이의 마음을 사로잡은 평민 출신의 화려한 금발미녀는 다이애나 비를 연상시킵니다. 하지만 이는 A=B 구조의 은유가 아니라 A<B 구조의 환유로 제시됩니다. 작품 속에서 의례와 품위를 강조하는 영국왕실에 대한 풍자와 해학이 경쾌하게 다가서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엘리자베스 여왕과 대처라는 여성총리 치하에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살아남는 강한 남성이 돼야한다는 강박관념을 강요받으며 살아야했던 영국 젊은이를 왕자가 상징한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본은 작품의 배경을 1960년대 영국으로 설정했습니다. 1960년생인 본은 그 시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형성되는 유아기를 보냈습니다. 또한 대처의 집권기인 1980년대는 그가 왕자와 같은 20대를 보낸 시기입니다. 영국의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당시는 대영제국의 화려한 영광과 작별을 고하고 차가운 현실을 마주해야했던 불만과 좌절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작품 말미에서 왕자가 죽음을 맞는 비극으로 끝맺은 것은 본과 동시대를 살며 상처받았던 청춘에 대한 애가(哀歌)의 성격이 짙습니다.

정신병원에 감금된 왕자. (사진제공=LG아트센터)
정신병원에 감금된 왕자. (사진제공=LG아트센터)


전 세계인에게 너무도 익숙한 고전을 완전히 새롭게 고쳐 쓰면서 거기에 동시대인의 고민과 아픔을 투영한 이야기 솜씨는 과연 경탄할 만했습니다. 더군다나 어린이와 노인들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대중성을 확보하면서 이런 예술성까지 갖추기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정신병원에 갇힌 왕자의 위축된 자아를 여왕과 그를 치료하는 의료진의 거대한 그림자와 대비해 풀어낸 장면과 왕자의 침대에서 백조들이 뛰쳐나오는 장면 등 2막 후반부를 장식한 시각효과는 웬만한 영화 뺨칩니다. 개인적으로 천재라는 말의 남발을 싫어하는데 매튜 본의 경우 '셰익스피어의 핏줄을 타고난 밥 포시'란 찬사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정 아쉬운 점은 이 무용극과 너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차이코프스키의 선율을 라이브가 아니라 녹음된 음악(MR)으로 들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영국 웨스트엔드와 미국 브로드웨이에서는 오케스트라 반주로 공연이 이뤄진다고 들었는데 언젠가 한번은 꼭 그런 공연을 보고 싶습니다. 2003년 첫 내한공연 이후 네 번째를 맞는 이번 내한공연은 30일까지 서울 강남구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펼쳐집니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 동영상 =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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