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박지하] 단막극의 부활이 값진 까닭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5월 27일 17시 43분


'드라마스페셜' 2화 '무서운 놈과 귀신과 나'. 무서울 것 없는 전설적인 조폭 앞에 나타난 여고생 귀신 이야기. 한 편으로 완결되는 단막극은 신인 발굴, 연작 제작 여부 결정을 위한 파일럿 프로그램 등으로 다양한 활용이 가능하다.(사진 출처=드라마 홈페이지)
'드라마스페셜' 2화 '무서운 놈과 귀신과 나'. 무서울 것 없는 전설적인 조폭 앞에 나타난 여고생 귀신 이야기. 한 편으로 완결되는 단막극은 신인 발굴, 연작 제작 여부 결정을 위한 파일럿 프로그램 등으로 다양한 활용이 가능하다.(사진 출처=드라마 홈페이지)

'아앗,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하는 조마조마한 순간, 주인공의 놀란 얼굴 혹은 의혹에 찬 시선이 클로즈업 되면서 극은 끝나버린다. 다음 시간에 계속….
또 한주간의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답답하거나 무리한 전개에 짜증이 나더라도 '욕하면서 본다'는 사태가 생기기도 한다. 영화와 같은 다른 영상물에 비해 비교적 충분한 시간을 두고 캐릭터를 구축하고 사람들을 그에 몰입시키는 것, 때에 따라서는 시청자의 반응에 따라 캐릭터를 움직이는 것, 그래서 '한번 보면 계속 보게 되는 것'이 드라마라는 장르가 가질 수 있는 장점이다.

미국드라마 중에서는 매 회마다 이야기가 마무리 지어지는 것도 많지만, 한국의 드라마는 다음 회를 기다리도록 가장 궁금한 대목에서 이야기를 끊어버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런 장점을 누릴 수 없는 드라마들이 있으니, 바로 단막극이다.

▶ '드라마 스페셜'로 부활한 단막극

저조한 시청률을 이유로 방송 3사에서 사라져버렸던 단막극이 KBS2 '드라마 스페셜'로 2년 만에 돌아왔다. 앞으로 6개월간 총 24편이 방영될 예정. MBC나 SBS의 경우 아직까지 구체적인 단막극 부활 계획이 발표되지 않은 상황이다. 15일 돌아온 KBS의 단막극은 신인들보다는 탄탄한 마니아층을 자랑하는 노희경 작가를 포함해 비교적 인지도 있는 작가들로 초기 라인업을 구성했다.

노희경 작가의 작품으로 기대를 모았던 '드라마 스페셜' 1화 '빨간 사탕'은 5%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2화 '무서운 놈과 귀신과 나'는 4.1%. 낮다면 낮다고 할 수 있는 시청률이지만 예전에 같은 시간에 방송됐던 '토요스포츠쇼'가 2.7%의 시청률을 기록한 것에 비하면 선방했다고 할 수 있다.

단막극의 부활은 상업성뿐 아니라 작품의 완성도 추구와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 완성도 높은 작품 제작, 시청률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다양한 시도는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TV에서의 단막은 개별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 산업적인 측면에서 몇 가지 의미를 가진다. 설령 일부 단막극의 수준이 괜찮은 시리즈물에 미치지 못한다 할지라도 단막의 특성 자체로 유지될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우선 방송국 차원의 리스크 관리이다. KBS는 '드라마 스페셜'의 의미를 단순한 단막의 부활이 아니라, '단편 드라마를 파종하고 연작 드라마를 수확하는 모판'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현재까지 방송된 2편의 단막은 방영작의 수준은 차치하고서라도 이야기 자체가 나름대로 연작화 가능성이 있는 작품들이다.
지금까지의 리스크 관리는 그저 안전한 이야기 구조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꽃보다 남자'에 이어 방송된 '아가씨를 부탁해', '아내의 유혹'의 뒤를 잇는 '천사의 유혹'과 같은 유사품들이 언제까지 성공을 거둘 수 있겠는가. 복수극이라는 뻔한 스토리를 바탕으로 한 '아내의 유혹'에는 적어도 기존 드라마와 다른 속도감이라는 새로움은 있었다. 시청자들의 변화하는 눈높이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

2년여 만에 부활한 단막극 프로그램,\'드라마 스페셜\' 1화는 노희경 작가의 \'빨간사탕\'. 가정과 회사생활에 지쳐가는 40대 출판사 영업부장 재박이 아침마다 지하철역에서 마주치는 빨간사탕을 문 유희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는 스토리다. (사진출처=드라마 홈페이지)
2년여 만에 부활한 단막극 프로그램,\'드라마 스페셜\' 1화는 노희경 작가의 \'빨간사탕\'. 가정과 회사생활에 지쳐가는 40대 출판사 영업부장 재박이 아침마다 지하철역에서 마주치는 빨간사탕을 문 유희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는 스토리다. (사진출처=드라마 홈페이지)


▶ 시청자 반응 '맛보기', 데뷔 무대 등 활용 가치 많아

새로운 이야기를 소재로 수 십 억원을 들여 16부작 미니시리즈를 제작하는 것보다는 단막으로 만들어 대중의 반응을 떠 보는 것이 위험부담을 줄이는 데는 효율적이다. 예능 프로그램들이 처음 하나의 코너로 선보였다가 반응이 좋으면 고정 코너가 되고 독립된 코너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중간에 언제라도 코너를 폐지할 수 있는 예능에 비해 한번 긴 이야기를 시작하면 일단 끝날 때까지 밀고 가야 하는 드라마의 특성상 리스크 관리는 더욱 중요하다. 어찌 보면 지금까지 단막극을 이런 가치로 활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놀랍다.

또한 일반 시청자들에게는 큰 관심사가 아닐지 몰라도 드라마 제작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단막극의 부활은 큰 의미를 가진다. 신인 작가들, 연출가들이 단막극을 통해 데뷔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제대로 된 기업들은 경기가 안 좋아도 일단 어느 정도는 신입사원을 뽑고 훈련시킨다. 대부분의 신입사원은 당장의 업무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교육비용이 더 들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의 인력운영만을 생각해서 신입사원을 키우지 않는 기업들은 조직 전체의 노령화를 각오해야 한다. 신규인력의 수급이 계속되는 것은 지속가능성을 위한 기본조건이다.

사실 조직에서 자체적 육성이 없이도 인력을 수급하는 방법이 있긴 하다. 경력사원 채용이다. 케이블 방송국이나 영화를 통해 양성된 인력을 공중파에서 상대적으로 좋은 조건으로 흡수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추노'의 경우와 같이 영화 쪽에 있던 인력이 드라마 쪽에서 일하는 경우가 늘어나는 것도 현실이다.

그러나 인력을 키우기 위한 여건이 상대적으로 나은 공중파 방송국은 여전히 세 곳 뿐이다. 더 열악한 여건에서 키운 인재들을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라 전체 영상산업을 위해 인력을 양성하는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구직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는 모 인터넷 기업은 경력사원 공개채용을 그만두었다. 이직이 많은 산업 속성상 그 기업에서 경력사원 공채를 할 때마다 작은 회사들에서 인력 수급에 동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업계의 공생을 위한 역할을 누가 할 것인가? 방송영상산업에서도 KBS뿐만 아니라 최소한 MBC까지는 새로운 인력을 위한 모판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단막의 부활과 강화는 앞으로의 변화에 대비하는 일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연속 드라마는 한 주의 일상으로 파고들고, 영화 관람은 특별한 이벤트로 차별화 되었다. 그러나 젊은 층에서 인기를 끄는 미드 'CSI'나 '24'의 경우 정해진 방송 시간을 기다려서 보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기기로 보는 것이 이미 일반적인 소비형태로 자리 잡았다.

영화의 경우도 극장 개봉 시기를 놓치더라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결국 IPTV 등이 일반화함에 따라 영화와 드라마는 제작여건이나 목적의 엄청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저 길이와 소재로 구분되는 경우가 늘어 날 것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컨텐츠들은 길이로 따지자면 2시간짜리 장편소설과 최소 16부작짜리 대하소설만 있는 셈이다. 지금부터 외출하기까지 한 시간 정도 자투리 시간이 있다고 할 때 완결된 프로그램은 예능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가볍게 볼 수 있는 한 시간짜리 이야기, 뒷이야기 없이 한 시간 정도로 똑 떨어져주는 이야기는 지금은 'CSI'니, '하우스'니 하는 미드에 있다. 전편을 보지 않아도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고, 후편을 보지 않고도 개운하게 끝나는 이야기들에 대한 수요를 누가 채워줄 것인가. 단막극이 이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줄 것이다.

박지하 칼럼니스트 jihapar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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