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지방선거에서 유권자들은 역대 지방선거와 달리 특정 정당에 표를 몰아주지 않았다. 3일 0시 30분 현재 개표 상황을 종합하면 곳곳에서 1, 2위 후보가 엎치락뒤치락하는 초접전 양상이 벌어졌다. 특히 당초 한나라당 후보가 무난히 앞서갈 것으로 예상됐던 서울에서도 혼전이 벌어졌다. 정치권에선 천안함 폭침사건의 그늘에 가려 있던 ‘정부 여당 견제론’이 막판 표심(票心)을 자극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한나라당이 강세인 지역에서 야당 및 무소속 후보가 강세를 띤 것은 세대교체를 희망하는 인물론이 주효한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1. 北風의 역설 천안함 다걸기한 與, 안보 피로감에 역효과
이번 선거에서는 3월에 터진 천안함 사건의 파장이 이어지면서 모든 선거 이슈를 빨아들이는 듯했다. 선거 기간 내내 천안함 뉴스가 흘러나오면서 유권자들의 안보 심리를 크게 자극해 ‘여당의 압승’을 점치는 기류가 많았다.
그러나 막상 개표함을 열자 수도권 여야 후보들의 득표율 격차가 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전체 선거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큰 서울시장 선거에서 여야 후보는 초박빙 상태로 나왔다. 선거 막판 정권 견제론과 심판론이 유권자의 표심을 흔들어 중간 심판 성격을 띠는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패배한다는 ‘속설’이 어김없이 재연된 것이다. 코리아리서치센터 김정혜 상무는 “천안함 사건으로 숨어 있던 정권 견제론이 투표 과정에서 드러나면서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왔다”고 말했다. 다른 여론조사 전문가는 “정부와 여당이 천안함 사건에 다걸기하면서 젊은층이 야권 지지로 결집하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분석했다.
3월 26일 발생한 천안함 이슈가 장기화되면서 선거일을 앞두고 이슈의 파급력이 점차 줄었다는 해석도 나온다. 일종의 천안함 피로현상이 발생했다는 얘기다. 경희대 김민전 교수(정치학)는 “이명박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 이후 천안함 이슈가 힘을 잃기 시작하면서 선거 막판 다른 이슈들이 표심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천안함 사태가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유권자들이 관련 뉴스에 덜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고 그 사이 잠재돼 있던 작은 이슈들이 서서히 수면 위로 부상했다는 설명이다.
특히 수도권 야당 후보들이 “여당을 찍으면 전쟁이 난다”고 주장하며 ‘전쟁 위험론’을 편 것도 표심에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다. 천안함 사건의 흐름이 북풍(北風)에서 역(逆)북풍론으로 방향이 바뀌면서 위기감을 느낀 진보 성향 표심이 결집해 추격의 발판을 만든 것 아니냐는 것이다.
2. 친노의 선전 세대교체론 반영… 유시민은 ‘안티’가 한계
16개 시도지사 선거에 출마한 친노(친노무현) 후보는 9명이었다. 이 가운데 민주당 한명숙(서울) 안희정(충남) 이광재 후보(강원)와 국민참여당 유시민 후보(경기), 무소속 김두관 후보(경남) 등 5명은 모두 한나라당 후보와 박빙의 승부를 펼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이들의 선전(善戰)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1주기(5월 23일)에 따른 노풍이 영향을 미친 것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새로운 인물로의 세대교체를 바라는 유권자의 뜻이 담겼다는 해석이 더 많았다.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경호실장으로 불렸던 국민참여당 유시민 경기도지사 후보가 한나라당 김문수 후보에게 밀린 것도 노풍의 위력이 제한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여론조사기관 관계자는 “이번 선거에서는 북풍도, 노풍도 없었다”며 “송영길 이광재 안희정 후보가 선전한 것은 젊은 정치인에 대한 유권자들의 기대심리가 반영된 결과”라고 해석했다. 이 관계자는 또 “경기도지사에 민주당 김진표 전 의원으로 단일화가 성사됐더라면 중도세력을 끌어안으면서 다른 결과를 이끌어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며 “호남표가 유시민 후보에게 등을 돌리는 등 안티세력이 많았던 것이 김문수의 인물론을 극복하는 데 한계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3. 야권 단일화 민주-민노 일찌감치 공조… 조직 풀가동
야권의 단일화가 일사천리로 진행됐던 것도 진보 진영의 표심을 결집시켰다는 해석도 나온다. 천안함 사건 등의 여파로 야권의 단일화가 큰 이슈가 되지 못했지만 조직표에서는 적지 않은 득표 요인이 됐다는 분석이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해관계 때문에 솔직히 야권의 후보 단일화는 어려울 것으로 봤다”며 “서울 등 주요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이 민주당 후보를 위해 조직을 풀가동한 것이 결과에 영향을 준 것 같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2006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압승에 기여한 ‘줄투표 현상’이 이번 선거에서는 야당 쪽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각 선거 단위에서 특정 정당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는 유권자의 성향이 광역단위 선거에서 변수가 됐다는 설명이다. 특히 서울에서는 민주당의 구청장 후보들이 대거 약진하면서 한명숙 후보에게도 표를 몰아줬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4. 높은 투표율 여론조사에 안 드러난 ‘젊은층 숨은 표’ 위력
이번 선거의 투표율이 역대 지방선거에서 두 번째로 높은 것은 20, 30대 젊은층이 적극적으로 투표에 참여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이런 현상은 투표 결과에도 영향을 미쳤을 개연성이 높다.
여론조사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숨은 표가 투표장으로 향하면서 예상과 달리 야당 후보들이 약진하는 결과가 나왔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젊은층의 투표 참여율이 높으면 야당 지지율이 올라가는 경향이 있다. 특히 진보 성향의 젊은 유권자들은 여론조사 결과에 위기감을 느끼고 막판에 강하게 결집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에서는 야당 후보 약진의 이유로 ‘보수표의 방심’을 꼽는 시각도 있다. 보수적 정서를 가진 유권자들이 여론조사에서 여당 후보가 크게 앞서자 마음을 놓고 투표장으로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날 수도권 골프장은 예약시간이 모두 찼을 정도로 성황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주까지 서울시장 선거 여론조사에서 큰 격차로 민주당 한명숙 후보를 앞서던 한나라당 오세훈 후보가 예상보다 낮은 득표율을 보인 것도 이런 기류와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우리 당 후보들의 높은 지지율이 독이 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견제론에 밀리면서 고전한 것 같다”고 말했다.
5. 세종시 저항 대전충남서 與맥못춰… 수정안 난항 예고
충청권에서는 야당의 강세가 두드러졌다. 대전시장 선거는 자유선진당 염홍철 후보가 높은 득표율로 한나라당 박성효 후보를 앞섰다. 충남도지사 선거에서도 한나라당 박해춘 후보는 일찌감치 민주당 안희정 후보와 선진당 박상돈 후보에게 큰 격차로 밀렸다. 세종시 민심의 중심인 대전·충남에서 유권자들은 세종시 원안 고수를 주장해 온 정당의 후보들을 선택했다.
이 때문에 지방선거 이후 정부와 여당이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하는 데 상당한 저항이 따를 것으로 예상된다. 야당은 충청권의 선거 민심을 앞세워 정부 여당에 ‘민심을 따르라’는 주장을 펼 것으로 보인다.
세종시 논란의 중심에서 비켜서 있는 충북은 3일 0시 30분 현재 민주당 이시종 후보가 한나라당 정우택 후보를 5%포인트가량의 격차로 앞서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천안함 사건이나 세종시 이슈보다 인물론이 상대적으로 중요한 변수가 된 것으로 분석된다.
6. 정계 회오리 與지도부 책임론… 민주 정세균 입지 강화
이번 선거 결과가 당초 예상을 크게 빗나가면서 여야 정치권에도 큰 후폭풍이 몰아닥칠 것으로 보인다. 수도권 석권을 포함해 압승을 노렸던 한나라당 내에선 조심스럽게 지도부 책임론이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새 지도부를 뽑는 7월 초 전당대회에서 세대교체의 요구가 거세질 가능성도 높다. 이는 정몽준 대표와 친이(친이명박)계가 연합해 이끌고 있는 당내 권력 구도에 큰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다.
특히 박근혜 전 대표를 중심으로 한 비주류가 쇄신론의 흐름을 어떻게 파고들지도 관심사다. 친박(친박근혜)계는 정 대표와 주류에 대한 책임론을 제기하며 압박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친이(친이명박)계에서는 박 전 대표가 접전지역의 지원유세에 나서지 않은 점을 들어 책임공세를 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앞으로 친이-친박 간 갈등이 커질 수 있는 상황이다.
민주당에선 386세력을 등에 업고 있는 정세균 대표와 주류의 입지가 공고해질 것으로 보인다. 천안함 사태 와중에서도 수도권 기초단체장 선거에서 앞섰고 서울시장과 인천시장 선거에서 선전한 것 등은 비주류로부터 당권 도전을 받고 있는 주류에게 힘을 실어줄 가능성이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