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과 충무로의 원조 '월드스타', 강수연 ●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로 또 한번 존재감 과시 다시 한번 타임머신을 타고 23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때는 1987년, 비운의 하이틴 스타 조용원이 치명적인 교통사고로 홀연히 은막을 떠났던 바로 그 해다. 동갑내기인 강수연은 '씨받이'라는 영화로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대한민국에서 '월드스타'란 타이틀을 처음으로 차지한 여배우가 되었다.
조용원이 맑고 청순하면서도 가녀린 이미지였다면, 강수연은 주위를 압도하는 강렬한 에너지 그 자체였다.
작지만 탄력 있는 몸매, 감출 수 없이 끓어오르는 열정을 품고 있는 듯한 눈빛과 입술, 표정에 따라 양 볼에 6개나 지는 보조개 등 너무나도 요염하고 관능적이면서 도발적인 매력을 지닌 여배우. 강. 수. 연.
이후로 그녀는 1980년대 충무로 최고의 섹시 스타로 떠올랐고, '얼음송곳' 같은 이미지로 줄곧 강한 캐릭터를 연기해냈다. 국내외 유수의 영화제들을 호령하는 원조 월드스타로서 연기생활 40년이 넘도록 쉬지도 물러서지도 않는 전문 연기자의 외길을 걸어온 것이다.
▶ 4세에 데뷔, 깜찍한 아역배우로 눈물샘 자극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난 강수연은 1969년, 4살 때 길거리에서 캐스팅돼 아역 탤런트로 활동을 하다가 1976년 이혁수 감독의 '핏줄'로 은막에 데뷔했다.
당시에는 충무로에 아역 배우가 몇 명 안되던 시절이었다. 강수연은 정말 수많은 작품에 출연할 수 밖에 없었고, 본인 스스로도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일요일을 편하게 쉬었던 게 딱 두 번"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녀는 거의 매일 학교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화사에서 대기시켜 놓은 차를 타고 현장으로 향했다.
아역시절 강수연의 대표작인 '비둘기의 합창'((1978년, 최현민 감독), '어딘가에 엄마가'(1978, 정회철), '슬픔은 이제 그만' (1978, 김준식), '하늘나라에서 온 편지'(1979, 김준식) 등은 대부분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꿋꿋하게 자라나는 어린이의 모습을 담아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그 속에서 그녀는 강인한 어린이의 모습을 깜찍하게 연기하며 많은 이들을 울렸다.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에 출연한 강수연(스포츠동아 양회성 기자) ▶ 1980년대에 가장 독보적이고, 가장 화려한 이력의 여배우
그러다가 1985년 강수연이 이른바 '성인 연기자'로서 처음 시도한 작품은 김수형 감독의 'W의 비극'(1985)이었다. 이 작품에서 그녀는 연기자 지망생으로 출연하여 파격적인 베드신을 선보이며 아역 이미지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리고 이어서 '고래사냥2'(1985, 배창호)와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1987, 이규형)에 출연하며 '청춘스타 강수연'으로 변신하였다.
이후 그녀는 충무로에서 가장 바쁜 배우가 되었다. 1980년대 중반 대부분의 여배우들이 결혼 등의 이유로 주춤한 이후, 1990년대 새로운 스타, 여배우 군단이 몰려오기 전까지, 강수연은 '오로지 영화만을 지키는' 독보적인 존재로 한국 영화계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서너 편의 영화를 동시에 촬영했고, 1987년에 개봉한 작품만 무려 6편이었다. 그러나 영화의 성격도 그녀의 역할도 다양했다.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에서는 당돌하고 발랄한 여대생을, '됴화'(1987, 유지형)에서는 오방살이 낀 한 많은 여인을, '연산군'(1987, 이혁수)에서는 치명적 유혹의 요부 장녹수를,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1987, 송영수)에서는 잡초 같은 접대부를, '감자'(1987, 변장호)에서는 가난하지만 당찬 농촌 아낙네를 완벽하게 연기하며 스무 살이 갓 넘은 배우가 보여주기엔 과하다 싶을 정도로 폭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
또한 같은 해 비극적 운명을 살아가는 대리모를 연기한 '씨받이'(1987, 임권택)에서의 열연으로 동양권 여배우로는 최초로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새로운 도약을 하게 된다.
이어 삭발 투혼(?!)이 빛났던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 임권택)로 모스크바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낭뜨 영화제까지, 그야말로 한국을 대표하는 여배우를 넘어 아시아 최고의 여배우로, 진정한 '월드스타'로 거듭 났다.
한국 영화가 기나긴 침체기를 거쳐, 해외에 진출하여 인정받고, 1990년대의 르네상스를 준비하는 그 시점의 중심에 강수연이 있었던 것이다.
30년째 연기중인 그녀는 영화와 결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영화에 빠져 살고 있다.(동아일보 서영수 기자) ▶ 1990년대의 '코리안 뉴시네마'와 함께 '생생한 여성 캐릭터' 창조
강수연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 유연하게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고 변해갔다.
꿈틀거리기 시작했던 '코리안 뉴시네마' 감독인 박광수, 장선우, 이현승 등과 '베를린 리포트'(1991) '경마장 가는 길'(1991) '그대 안의 블루'(1992) 등에서 만났고, '그 여자, 그 남자'(1993)에선 당대의 트렌드였던 로맨틱 코미디와 조우했다.
곽지균, 장길수 감독과 '그 후로도 오랫동안'(1989)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90), '웨스턴 애비뉴'(1993), '깊은 슬픔'(1997) 등에서 꾸준히 작업하며 '사회성 짙은 멜로의 히로인'이 되었고, 이명세 감독의 '지독한 사랑'(1996)에선 그녀의 치명적인 멜로 연기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1991년엔 대만 영화 '낙산풍'에 출연했는데, 지금은 수많은 한국 배우들이 해외 영화에 출연하지만 당시로선 아주 놀라운 일이었다.
강수연은 과거 선배 여배우들이 지녔던 어떤 '전형성'에서 벗어나, 일견 모순적이면서도 복합적인, 독특한 이미지와 가장 생생하게 살아 있는 여성 캐릭터를 만들어냈는데, 이러한 그녀의 행보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이른바 '페미니즘' 계열로 분류되는 영화들이다.
'여성의 일과 사랑'이라는 화두를 다루며 한국영화에 본격적인 페미니즘 논쟁을 불러온 '그대 안의 블루'(1992), 공지영의 원작을 영화화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5), 여성들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낸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엔 모두 강수연이 있었다.
그녀는 단지 배우 개인의 성향과 취향을 넘어, 당대 고학력 여성들이 갖고 있던 갈등과 고민, 삶의 무게와 절망 등의 사회적 흐름을 빨리 파악하고, 그 흐름을 주도해나가는 선봉에 서 있었던 것이다.
1980~90년대 충무로의 가장 대표적인 여배우 강수연. '그대와의 블루'에서 호흡을 맞춘 안성기(동아일보 DB) ▶ 인생의 9할을 배우로 살아온 '평생배우'
그 극단적이고 강한 이미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너무 일찍 얻게 된 '월드스타'라는 빛의 그림자가 그만큼 짙어서였을까. 아쉽고도 안타깝게도 그녀는 2000년대에 들어서는 '영화배우'보다는 한국영화의 발전을 위한 일이라면 서슴지 않고 행동하는 '영화인'으로서 더 많은 활약을 보여준다.
이제 그녀의 나이 44세, 그 중에서 연기 인생 40년. 정말로 인생의 9할을 배우로 살아온 '천상 배우'. 그녀가 오랜만에 출연한 영화가 곧 개봉을 앞두고 있다.
1000년의 세월을 견딜 수 있어 한민족의 은근한 끈기를 드러내는 우리의 값진 문화유산인 명품 한지와 그것을 복원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다.
그녀가 '한지' 뿐 아니라 '연기'에서도 복원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그녀가 꿈이라 밝혔듯이 '평생 배우', '할머니 배우'가 되는 모습을 1000년까지는 아니더라도, 계속 지켜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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