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량기반 교육’이 먼저 주목받은 곳은 학교가 아닌 기업이었다. 고학력 인재를 선발해도 기업이 원하는 만큼의 업무 처리 역량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발 빠른 기업들은 1990년대부터 리더십, 기획 능력, 발표 능력 등 기업인이 갖춰야 할 역량을 길러주기 위한 교육을 시작했다. 역량에 대한 관심이 학교 교육현장에 들어온 것은 불과 10년 전이다. 2000년대 초에야 학생들이 사회에 진출했을 때 맞닥뜨리게 될 환경에 잘 대처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 주장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 중 하나가 캐나다 퀘벡 주다. 퀘벡은 2001년부터 ‘역량기반 교육과정’을 도입해 시행하고 있다.》
○ 역사 시간이라고 역사만 배우나
퀘벡의 대도시 몬트리올 외곽에 자리 잡은 클리어포인트 초등학교는 플라타너스 나무에 둘러싸인 시골 마을회관 같은 분위기였다. 이 학교 샘 브루체스 교장은 “조용한 분위기라고요? 얼마나 활발한 아이들인지 보여 드리죠”라며 수업 중인 6학년 교실 문을 열었다.
역사 수업 중인 학생 20여 명은 네다섯 명씩 둥근 책상에 모여 한창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학생들은 각자 노트북 컴퓨터로 정보를 찾아가며 몬트리올의 역사에 대해 공부하는 중이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지만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교사는 아이들과 뒤섞여 크게 웃으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수 라리비에 교사는 “교사가 모든 걸 다 알려줄 필요는 없다”며 “아이들이 스스로 정보를 찾고 얘기를 나누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했다.
수업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학생들이 저마다 조금씩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학생은 몬트리올의 역사에 대한 에세이를 쓰고 있었고 또 다른 학생은 오랜 역사를 지닌 교회 건물을 그리면서 배경 설명을 쓰고 있었다. 한 학생은 몬트리올에 대한 영어 설명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라리비에 교사는 “역사 지식을 아는 것은 기본”이라며 “지식을 표현하고 활용하기 위한 다양한 역량을 키워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학급에는 한국에서 온 김성호 군(12)도 있었다. 퀘벡에 온 지 1년이 됐다는 김 군은 “시험 부담이 없다는 것이 한국과 가장 다른 점”이라며 “학교가 재미있다”고 말했다.
퀘벡의 역량기반 교육과정은 유치원부터 시작된다. 클리어포인트 초등학교 인근에 있는 한 유치원에서는 4, 5세 아이 10여 명이 스페인어 수업을 받고 있었다. 이날의 주제는 태양계 행성에 대해 알아보는 것. 아이들은 컴퓨터를 이용해 금성, 목성, 토성을 그려 보고 행성 모형을 만져 보며 순서도 익혔다. 저마다 행성을 하나씩 맡아서 태양 역할을 맡은 친구 주위를 춤을 추듯 빙빙 돌기도 했다.
레스터 비 피어슨 교육청장인 로버트 밀스 씨는 “아이들마다 배우고 싶은 게 다르고 배우는 스타일도 다르다”며 “가르치는 수단을 전부 이용해야만 아이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 하나의 문제로도 다양한 역량 평가
“역량을 키워주는 것은 좋다. 그런데 역량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역량을 시험으로 평가할 수 있느냐는 문제는 역량기반 교육과정을 둘러싼 주요 논쟁거리다. 밀스 교육청장은 이 질문에 “물론 평가할 수 있다”고 단언했다.
클리어포인트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이 치르는 ‘문제해결력’ 평가지는 단 한 개의 질문으로 구성돼 있다. “세계 여행을 하려는데 가장 좋은 경로를 만들어 보라”는 것이다.
평가지는 총 4장이다. 세계지도에 방문할 주요 도시가 표시돼 있고 각 도시에서 하루를 머물기 위해 얼마가 필요한지 표로 제시했다. ‘비행기는 8시간 이상 날 수 없다’ ‘대륙을 건널 경우 비행 요금이 더 비싸다’ ‘총여행거리는 3만5000km 이상 5만 km 이하여야 한다’ 등 다양한 제한 조건도 있다.
브루체스 교장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지도의 거리를 실제 거리로 바꿀 수 있는 능력, 정확한 계산 능력, 각 대륙과 국가의 문화에 대한 이해가 동시에 필요하다”고 말했다. 얼마나 그럴듯한 여행 계획을 세우는지에 따라 교사는 학생의 성취도를 평가한다. 학생은 자신이 세운 여행 계획을 다른 학생들 앞에서 발표한다. 학생은 이 도시를 왜 방문해야 하는지도 설명해야 한다. 브루체스 교장은 “규칙을 잘 따랐는지, 계산에 실수는 없는지, 논리적인지, 다양한 문화에 관심이 있는지를 한꺼번에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 교육과정 정착에 10년 걸려
퀘벡은 1960년 만든 교육과정을 2000년까지 유지했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내용이 계속 교육과정에 들어오면서 지나치게 방대해지는 문제점이 나타났다. 퀘벡 주 정부의 기 뒤마 교육국장은 “교육과정에서 다루지 않는 게 없을 지경이었다”라며 “그래서 무엇이 ‘핵심’이냐는 논의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핵심은 지식이 아닌 역량’이란 결론을 내렸지만 교원단체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다. 뒤마 국장은 “수십 년간 지식을 가르쳐 온 교사들을 바꾸기는 쉽지 않았다”라며 “당장 교사들이 뭘 해야 할지도 몰랐고 할 일이 늘어날 거라고 생각하는 교사가 많았다”고 말했다.
퀘벡 주정부의 대책은 ‘대화’와 ‘지원’이었다. 모든 과목 교사들과 정부가 협력체를 구성해 교육과정 개편을 함께 주도했다. 새로운 교육과정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교사들을 위해서는 ‘교육 상담사’ 제도를 만들었다. 교육 상담사는 가르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교사가 있다면 어디든 찾아가 상담을 해준다.
“놀기만 하고 지식은 안 가르치는 것 아니냐”라고 불만을 표시하는 학부모도 있었다. 뒤마 국장은 “퀘벡에는 700만 명(퀘벡 전체 인구)의 교육 전문가가 있다는 말이 있다”며 “모든 사람에게 새 교육과정을 알리기 위한 홍보도 열심히 해야 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도 교육과정 개편 논의가 한창이라고 말하자 뒤마 국장은 “교육과정은 길게 봐야 한다”는 조언을 했다. 그는 “우리는 교사들을 설득하는 데 10년이 걸렸다. 그 결과 지금은 모든 교사가 학교를 즐거워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아이들도 학교를 즐거워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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