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갑고 도도한 조 실장, 실제 모습은 수다맨?
● 강남 개발시대를 실제로 목격한 '강남 키드'
● 비중 있는 역할, 답답한 틀에서 빠져나온 느낌
"오늘은 촬영이 평소보다 일찍 끝난 편이예요. 힘들지는 않은데 왜 이렇게 배가 고픈지…." 12일 오후 6시 경기도 일산 SBS탄현제작센터에서 만난 탤런트 주상욱(32)은 촬영을 마치니 공복감이 밀려온다며 연신 먹을 것을 찾았다.
취재진이 먹다 남은 아몬드 쿠키를 급하게 입에 털어 넣느라 목이 막혀 '켁켁' 소리를 냈다. 새로 주문해 준 키위 주스 한 대접(컵이 상당히 컸다)을 순식간에 해치우고도 여전히 배가 고픈지 과자 한 봉지를 더 주문했다. 그러고 나서 "원래 군것질 절대 안하고 밥만 먹는 체질인데…"라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의 비범한 식성은 팬들 사이에선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지난해 MBC '선덕여왕' 촬영장에서는 어묵꼬치를 순식간에 15개나 먹어 치운 사실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너무 춥고 피곤할 때 비담 역을 맡은 김남길 씨 팬클럽에서 야식차를 보내 꼬치 15개는 물론, 국수 떡볶이까지 몽땅 먹었다"며 "남자가 이 정도 먹는 게 많이 먹는 건가"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침없는 식성만큼 대답도 시원시원했다. 연예인이라면 걸러서 하기 마련인 민감한 답변들마저 '날 것' 그대로 뱉어냈다. '깨방정'이나 '주접'까지는 아니더라도 수다스럽고 솔직한 스타일. 시시때때로 배고프다고 보채지만 않는다면 인터뷰이로서 더 이상 바랄게 없었다.
SBS 월화드라마 '자이언트' 조민우 실장에게서 느꼈던 차가운 이미지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1999년 데뷔,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잔뼈가 굵은 연기력 덕분일까.
▶ 반듯한 역은 이제 그만, 악역이 좋은 까닭
'자이언트'는 1980~1990년대 강남 개발사와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탐욕, 경제 계급의 변화, 가족애를 그린 드라마다. 이 작품에서 그는 비열하게 돈을 모아 정치하는 아버지(정보석 분)처럼 물불 가리지 않고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인물을 맡았다.
주상욱은 그동안 MBC드라마 '깍두기'(2008년), '춘자네 경사났네(2008년)', KBS2 '그저 바라보다가'(2009년) 등에서 반듯한 부잣집 도련님 역을 주로 맡았다. MBC '선덕여왕'(2009년)에서도 강직한 가야의 왕자 월야를 연기했고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에서는 손예진의 착한 두 번째 남편으로 나왔다. 조민우 같이 철저히 비열하고 재수 없는 악역은 이번이 처음이다.
- 주인공의 라이벌, 그것도 악역을 맡은 이유는? "항상 젠틀한 이미지에 매너 있는 남자, 저도 많이 지겨워요. 뭔가 색다른 모습으로 변신을 해야 하는데 갑자기 추리닝 입고 망가지기는 쉽지 않고…. 뭐, 사실 배역의 비중이 크다는 것도 출연 결심에 큰 이유가 됐고요."
그는 드라마 속 배역의 비중에 대해서도 넌지시 욕심을 드러냈다. 서울시장 후보 아들로, 사랑하는 여자(김아중)를 두고 정략결혼을 하는 역할을 맡았던 '그저 바라보다가' 때의 아쉬움 때문일까. 황정민, 김아중과 함께 주연급으로 출연했던 그는 회를 거듭할수록 비중이 줄어드는 굴욕을 맛봤다.
"그 때 맡았던 캐릭터가 '자이언트' 주인공 이름과 같은 강모였어요. 욕망가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점, 톱스타 여자 친구를 두고 있다는 점('자이언트'에서 그는 연예인이 되는 미주(황정음)와 연인이 된다) 등이 조 실장과 비슷했죠. 그런데 '그저 바라보다가'의 남녀 주인공들이 이어지길 원하는 시청자 의견이 많다보니 제가 자연히 밀려나더라고요. 속상하긴 했지만 황정민, 김아중 씨에 비해 제가 '급'이 떨어져서 그런거겠죠."
- '자이언트'에서의 비중은 마음에 드시는지요. "작가님이 드라마 흐름을 중시하시지 배우의 인지도에 맞게 분량을 정하는 스타일이 아니세요. 현재 흐름이 이강모(이범수), 성모(박상민)와 저와 아버지 조필연의 대결구도 전초전이고, 조 실장과 황정연(박진희)의 멜로가 마무리되고 이미주(황정음)와의 사랑이 싹트는 시점이라 제가 출연하는 장면이 많아졌어요. 그런데 이런 비중도 앞으로 드라마 전개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죠."
- 지금은 조 실장보다는 조필연의 악행이 더 많이 부각되는데 대를 이어 악한 가족이 되는건가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하죠. 워낙 정의로운 강모와 라이벌 관계다보니 수단과 방법을 가릴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가족애적인 측면에서 보면 아버지가 자식을 위해 악행을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죠? 원래 악마적인 캐릭터라기보다는 자식 잘되라고, 또 스스로 출세를 위해 앞만 보고 달리다보니 무리를 하게 된 거죠. 아, 잠깐만요. 근데 다시 생각해보니 조 실장이 살인을 사주하기도 하는데… 뭐, 정말 나쁜 놈이네요. 앞으로 미주와 연애하는 모습에서는 인간적인 매력도 느끼실 거예요. 사실 정연이도 진심으로 사랑하긴 했었죠. '까여서' 그렇지…."
'자이언트'에 드러나는 주제 의식 중 하나로 유독 가족애를 강조한 그는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도 애정을 표시했다. '친구 같은 엄마'와는 지난해 TV토크쇼에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이달 말 태어날 예정인 둘째 조카에 대해서도 역시 기대를 감추지 못했다.
"누나는 연세대 불문과 출신이고 여동생은 서울대 박사예요. 공부 잘하는 딸들이 있어서 그런지 어머니가 저한테는 공부를 한 번도 강요하지 않으셨어요. 연기를 한다고 했을 때도 열심히 하라고 밀어주셨고요."
인터뷰 도중 그가 입은 재킷은 드라마 촬영용으로 차려 입은 복고풍의 투버튼 스타일이었다. 요즘도 투버튼을 입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선지, 그의 출중한 외모 덕분인지 촌스럽게 느껴지진 않았다. 주상욱이 시대극에 출연한 것은 이번이 처음. 그가 느낀 시대극만의 매력은 뭘까.
"시대극은 현대극과 사극의 딱 중간쯤인 것 같아요. 사극은 발성이나 발음을 할 때 힘을 많이 줘야 한다면 현대극은 가볍게 해야 하는데 시대극은 그 중간쯤으로 정도를 조절해야 하죠. 그것 외에는 크게 다른 점은 없는 것 같아요. 어차피 어떤 종류의 드라마나 다 사람 사는 얘기를 다루는 것이니까요."
강남 개발사를 다룬 '자이언트'는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와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거치며 조민우로 대변되는 악인의 몰락을 그려내게 된다. 그는 5살 때부터 서울 서초동 삼풍백화점 근처에서 산 덕에 강남의 개발사를 두 눈으로 목격한 '인연'이 있다.
"어렸을 때 살던 저희 집이 높은 곳에 있어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거리가 한 눈에 들어왔어요. 그 때 집 주변에는 주공 아파트, 고속 터미널만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건물이 하나 둘씩 올라오더라고요. 고1때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는데… 어휴, 기억이 생생해요."
- '반포의 권상우'라는 별명도 있으시던데…. "아 그거요, 그냥 엄마 친구분들이 지어주신 거예요. 그냥 권상우 씨처럼 유명해지라는 뜻에서…."
▶ 헐벗은 그, 여심 잡는 비결은?
- '자이언트'에 출연하는 주연급 남자 배우 중 가장 젊고 잘생겼다는 이유로 여성팬들이 늘어난 것 같아요. 특히 동갑내기 라이벌로 출연하는 이범수 씨와는 실제로 아홉 살 차이가 나다보니 상대적으로 훨씬 젊어보인다는 평을 들으시는데…. "가끔 샤워신이 있어서 그런가요? 하하. 제 팬들 중엔 저보다 나이가 많거나 비슷한 여성들이 많은 것 같아요. 뭐, 어린 친구들이 아이돌 따라다니지 저 따라다니겠어요? 연기적인 면에서는 경험 많은 선배들이랑 하니까 정말 편해요. 범수 형, 상민이 형하고는 스스럼없이 의견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하고요."
- 욕조신, 샤워신 등 '헐벗는 신'은 팬서비스 차원인가요? "그러게요. 작가 선생님이 자꾸 이런 장면을 써주시네요. 배우니까 대본대로 해야죠. 그런데 요즘 하도 '몸짱' '식스팩' 운운하니까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예요. 요즘 시간이 없어서 오랫동안 운동을 못했더니 화면에 고스란히 나타나더라고요. 아, 범수 형도 상반신 탈의 컷이 있었는데 정말 몸이 좋으시던데요."
- 황정연과의 멜로에 이어, 이미주와의 멜로가 본격화될텐데 박진희, 황정음 두 배우들은 실제 겪어보니 어떤가요. "진희 씨는 연기할 때 굉장히 진지해서 촬영할 때만큼은 장난도 못 쳐요.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편인데 그래서 연기를 잘 하나봐요. 정음 씨는 극 중반에 여러 가지 말(연기력 논란)들을 들었는데, 그래선지 더 열심히 하더라고요. 실제 성격도 미주처럼 밝고 명랑한데다 열심히 하는 모습이 예뻐요."
- 실제 이상형은? "전 여성스럽고 가냘픈 스타일보다는 재밌고 털털한 여성이 좋아요. 어렸을 때부터 지나치게 여성스러운 스타일은 부담스럽더라고요."
그는 드라마 속에서 유독 이뤄지지 못하거나 힘든 사랑을 많이 했다.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에서는 심지어 남편 있는 여성과 결혼한 '세컨드' 역할이었다. 그런 이유로 '힘든 사랑 전문 배우'라는 얘기도 들었다.
- 힘든 사랑을 연기하는 게 어렵지 않나요? "사실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가 '쉬운 사랑'일 수 있을까요. 실제로 사랑을 해도 힘든 사랑이 더 많은데 극 속에서는 말할 것도 없죠. 쉬운 사랑은 실제로나, 극 속에서나 재미도 없을 것 같은데요?"
▶ 굶주린 배우, 자이언트를 꿈꾸다
- 최근 몇 년간 쉬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해왔어요. "(우울한 눈빛을 지어보이며) 근데 시청률이 많이 안나와서…. 올해는 '자이언트' 말고도 아직 편성이 결정되지 않은 사전 제작 드라마 '파라다이스 목장'과 영화 한편을 더 찍었어요. 솔직히 여러 작품에 함께 출연하느라 정말 죽을 뻔 했어요. 특히 지난 5월 한 달간은 잠 한 숨 못잘 정도였고요. 이러다 쓰러지지 싶었는데 절대 안 쓰러지던데요? 저도 '응급실 링거투혼' 한 번 해보는 건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던 그는 연예인들의 '혼절 후 응급실행' 소식 중 상당수는 사실 과장된 것이라고 속삭였다. 그러다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말을 고쳤다. "잠시 아찔해서 자리에 주저앉았다가 병원 가서 링거 맞는 것도 '혼절 후 응급실행'이 아니라고는 못하겠네요. 근데 전 그 정도로도 쓰러지는 법이 없어요."
다행히 올 여름이 끝날 때까지 '자이언트' 촬영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는 그는 "전날 새벽까지 찍는 분량이 당일 밤 방영되는 빡빡한 일정이지만 사전제작 드라마보다 나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드라마 팬들은 시청자들의 반응이 드라마에 즉각적으로 반영되기를 원하시는 것 같아요. 참여형인 거죠. 사전 제작 드라마는 완성도는 더 높지만 시청자 입장에선 자신들의 의견으로 드라마 흐름을 바꿀 수 없으니 관심을 덜 쏟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인터뷰가 끝나자 그는 "곧바로 밥 먹으러 가야겠다"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장난스런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제가 인터뷰를 넘 솔직하게 했나요? 걸러서 잘 써주세요. 저 불쌍한 놈이거든요. 잘돼야 하니까 좀 도와주세요."
연기에도 굶주린 듯 했다. '자이언트'에서 조민우 말고 탐나는 역할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강모나 성모"라고 답한 뒤 "아무래도 주인공을 하고 싶다는 뜻?"이라고 넌지시 '진심'을 내비치기도 했다. '자이언트'가 연기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또한 늘어난 출연 분량만큼 보여줄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제야 제 모습을 한 꺼풀 벗겨 충분히 보여드리게 된 느낌이예요. 뭔가 답답한 틀에서 빠져나온 기분이랄까. 그래서 이번 촬영이 더 재밌게 느껴져요."
드라마 제목인 '자이언트(재능이 뛰어난 거물)'는 이 '굶주린' 배우의 꿈이자 목표였다. 김현진 bright@donga.com 최현정 phoe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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