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2TV의 납량특집 월화드라마 '구미호 여우누이뎐'. 양반가의 어린 아씨 초옥(서신애 분)은 자기가 좋아하는 정규 도령(이민호)이 집에서 부리던 구산댁의 딸 연이(김유정)에게 마음이 가 있는 걸 알고 크게 화낸다. 연이를 불러 뺨을 때린 걸로도 모자라 여종을 시켜 차가운 우물에 빠뜨린다. 10여초 간 물을 먹으며 오르락내리락 거리던 연이는 끝내 의식을 잃고 바닥에 서서히 가라앉고, 초옥은 섬뜩한 얼굴로 깔깔거린다. "죽는 순간까지 똑똑히 지켜볼 거야."
가해자 초옥과 피해자 연이의 극 중 나이는 만 9세, 실제 연기자는 12세와 11세 어린이들이다. 다행히 연이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구미호의 피 덕분에 각성해 기사회생하지만, 시련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아직 솜털도 가시지 않은 어린 배우들은 앞으로 간을 빼앗긴 채 처참하게 죽는 독한 연기까지 해내야 한다.
드라마 속 아역들이 감당해야 하는 폭력 장면이 갈수록 선정적이고 자극적이 돼가고 있다. 예전에는 어린이가 학대당하거나 죽는 모습은 영상화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금기는 영화계에서 일찌감치 깨졌다. 2003년 개봉작 '바람난 가족'과 '4인용 식탁'은 어린이가 잔인하게 살해되는 장면을 직접적으로 묘사해 평단의 비난을 받았다. 2005년 첼로-홍미주 일가 살인사건'은 발달장애 어린이가 다섯 살가량 된 여동생을 난간에서 떨어져 죽게 하는 장면이 나왔다.
동성애 금기가 영화에서 깨지고 안방극장으로 이어졌듯, 요즘은 안방극장에서도 흉기로 찔리고 얻어맞는 아이들의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MBC 수목 드라마 '로드넘버원'에서 머슴의 아들 장우(주한하)와 주인집 딸 수연(김유정)은 어린 시절부터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 장우는 수연이 목욕하는 모습을 몰래 훔쳐보며 누드 스케치를 하다가 수연이 오빠에게 들키고, 오빠는 장우의 손을 흙이 잔뜩 묻은 낫으로 힘껏 내려찍는다. 카메라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11세 남짓 된 어린 소년의 손등에서 검붉은 피가 철철 흐르는 장면을 집요하게 보여준다. 다친 손은 평생 장애로 남는다. 커서 군인이 된 장우는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떨리는 손과 사투를 벌이게 된다.
무일푼 맨주먹으로 시작한 주인공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장하는 내용을 담은 드라마일수록 어린 시절 이웃 어른이나 동네 깡패들에게 뭇매를 맞는 장면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맞아도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주인공의 강단을 보여주는 장치지만, 피범벅이 될 정도로 부어터진 얼굴을 지나칠 정도로 사실적으로 화면에 담아낸다.
아동 학대 문제에 둔감해져서인지 이제는 이런 장면을 탓하는 시청자들도 많지 않다. 오히려 시청자 게시판에는 "어린이가 기특하게도 작품을 위해 몇 시간동안 두려움과 싸우며 연기를 해냈다", "OO이 안 나오면 드라마를 안 보겠다" 등의 칭찬 글이 올라온다. 방송사는 문제의 장면을 홍보하는 보도 자료까지 내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TV 드라마의 도를 넘은 아동 학대 묘사가 일상의 폭력 증가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계한다. 성행위가 담긴 장면을 자꾸 보면 성적인 자극에 무덤덤해지듯 사람 심리라는 게 무언가를 자주 보면 경계심도 낮아지고 일상적으로 받아들이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연세신경정신과 손석한 원장은 "(문제의 장면을 본) 사람들이 아이들을 해치는 게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일상의 폭력에 둔감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손 원장은 "영화는 내 의지로 보는 것이지만 드라마는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보기도 한다. 더구나 가족이 함께 보기 때문에 그 폐해는 영화보다 더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실험집단에게 폭력장면을 보여준 뒤 축구를 하게 하면 반칙이 더 증가하는데 이를 관찰학습 효과라고 한다"며 "폭력적인 드라마 장면은 부모의 뇌리에 잠재돼 있다가 아이가 잘못했을 때 부모가 과도한 반응을 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드라마 평론가인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방송사의 시청률 지상주의를 지적했다. 윤 교수는 "방어능력이 없는 어린이에 대한 학대와 폭력은 시청자의 분노를 배가하고 극에 몰입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며 "방송사들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시청률을 올리려고 한다. 수위조절이 필요하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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