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하정규] 원작의 깊이를 못 살린 ‘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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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15일 14시 54분


강우석 감독의 액션 스릴러 \'이끼\'. 사진 제공 이노기획
강우석 감독의 액션 스릴러 \'이끼\'. 사진 제공 이노기획

소설이나 만화 같은 원작에 필적하거나 뛰어넘는 영화를 만들기란 대단히 어려운 법이다. 글과 그림으로는 작가의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지만, 고작 1~3시간 안에 제한된 인원과 예산으로 만드는 극장 영화는 표현의 깊이와 폭에 제약이 많다. 특히 배우의 표정과 대사로만 표현되는 심리 묘사는 더더욱 그렇다.

영화 '이끼'의 제작자나 감독은 이런 제약 속에서 과감하게 원작을 재구성할지 아니면 재해석해서 핵심만을 보여줘야 할지를 고민했을 법했다. 2009년을 뜨겁게 달군 인터넷 만화 '이끼'를 영화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강우석 감독은 영화 '이끼'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품 조연들의 훌륭한 연기를 바탕으로 스릴러적인 요소를 극대화하면서도 적절한 위트와 유머를 결합해 대중성을 강조한 영화를 선보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캐릭터들 간의 치열한 갈등과 투쟁의 이면에 더 깊이 존재하는 개개인의 성장사와 내적 갈등을 간과함으로써 짜릿하고 흥미로운 범죄 스릴러를 넘어서는 더 깊은 공감과 감동을 원하는 관객들의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 수상한 마을에서 부친의 사인을 밝히려는 도시 청년

이방인 유해국(오른쪽)과 마을이장 천용덕은 영화 ‘이끼’의 이야기를 끌어가는 갈등의 두 축이다. 사진 제공 이노기획
이방인 유해국(오른쪽)과 마을이장 천용덕은 영화 ‘이끼’의 이야기를 끌어가는 갈등의 두 축이다. 사진 제공 이노기획

이야기는 외딴 시골 마을에 살던 유목형(허준호 분)의 원인 모를 죽음에서 시작된다. 의절한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찾아온 서울청년 유해국(박해일)은 처음부터 자신을 껄끄러워하는 마을 사람들의 이상한 반응을 접하고 거부감을 느낀다. 마을 주민은 해국에게 서울로 돌아가라고 종용까지 하고, 그 가운데에는 마을의 이장 천용덕(정재영)이 있다. 그는 이 마을은 물론 인근 일대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다.

"서울로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유해국의 이 한마디에 천용덕과 마을 사람들은 매우 놀라면서 싸늘한 거부감을 표시한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 탓에 작은 폭력사건에서 검사 박민욱(유준상)의 부당한 합의 요구를 녹음해 그를 한직으로 물러나게 했던 유해국은 거기서 뭔가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음모의 냄새를 맡게 된다.

30대 이혼녀 이영지(유선)가 운영하는 밥집에서 기거하게 되는 유해국은 천용덕의 측근으로 보이는 3명이 끊임없이 자신을 감시하고, 또 이 여인의 방에 들락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더욱 의심을 품는다.

천용덕은 유해국을 집으로 초청해 겉으론 따뜻하게 대해 주지만, 유해국은 아버지의 재산이 모두 그에게 양도된 것도 알게 되고, 자신의 집에서 수상한 장부들과 알 수 없는 비밀통로를 발견하면서 놀라게 된다. 고민 끝에 자신이 물 먹였던 박 검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 원작을 비트는 반전과 배우들의 열연

'이끼'의 한 장면. 자동차를 타고 가는 유해국(왼쪽)과 이영지. 사진제공=시네마서비스
'이끼'의 한 장면. 자동차를 타고 가는 유해국(왼쪽)과 이영지. 사진제공=시네마서비스

이 영화의 상영시간은 2시간40분이 넘지만 독특한 스토리와 높은 긴장도 덕분에 시간이 언제 지났는지 모를 만큼 빨리 흘러간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볼거리는 주인공 정재영과 박해일을 비롯해 유준상, 유해진, 허준호, 김상호, 김준배, 유선의 뛰어난 연기다. 대한민국 명품 조연들의 총집합이라 할 만하다.

마을 이장 천용덕 역인 정재영의 연기는 검버섯이 돋보이는 특수 노인분장과 함께 시종일관 깊은 인상을 남긴다. 또한 계속해서 부딪히는 유해국과 천용덕의 불꽃 튀는 두뇌 싸움과 감정 대결이 흥미진진하다. 아울러 유해국과 박민욱 검사 및 천용덕과 박민욱 검사 간의 감정 대결도 예사롭지 않다.

무엇보다 주요한 만남에서 항상 직설적으로 상대방의 생각을 꿰뚫는 송곳 같은 어법과 질문들은 시종일관 흥미와 긴장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또한 원작을 비트는 마지막 반전은 범죄 스릴러의 매력을 한껏 높여주기도 한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사실 한 번 보아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기도원 사람들이 왜 누구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고 그리고 신앙을 중요시하는 이상주의자인 유목형이 왜 천용덕과 함께 마을을 짓게 되는지 하는 부분이 영화만 보고는 명확하게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는다. 또한 인터넷상에서 원작과의 비교 논란도 많았기 때문에, 결국 원작을 보지 못했던 필자는 영화는 일단 그 자체로만 평가한다는 평소의 주관을 버리고(!) 밤을 새워서 원작 만화를 참조했다.

원작 만화는 기대한 만큼 상당한 깊이와 복잡하고도 독특한 스토리 구성을 보여 놀라웠는데, 필자가 이 영화에서 부족하거나 아쉽다고 생각한 점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점이 인상 깊었다.

▶ 등장인물의 부실한 성장사와 내적 고뇌의 아쉬움

신앙을 중요시하는 이상주의자인 유목형(왼쪽)은 천용덕과 함께 마을을 짓게 된다. 스포츠동아 자료사진
신앙을 중요시하는 이상주의자인 유목형(왼쪽)은 천용덕과 함께 마을을 짓게 된다. 스포츠동아 자료사진

극장 영화의 기본적인 제약점을 염두에 두더라도, 이 영화의 아쉬운 대목은 대단히 많다.

첫째로 아버지 유목형과 아들 유해국의 인간적인 관계 설명이 없다. 유목형 부자의 애증 관계의 묘사가 거의 없다. 즉, 아버지와 의절했던 주인공이 아버지의 사인을 파헤치면서 그동안 몰랐던 아버지의 인생에 대해 알아가는 내용이 주를 이룸에도 불구하고 그 공감의 핵심 고리가 결여되어 있는 점은 치명적이다.

핵심 인물인 유목형의 캐릭터가 원작에서보다 불명확하게 그려진 점도 아쉽다. 결국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유목형의 살인범을 찾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베트남 전에 참전했다가 임신한 베트콩 여성을 죽이게 된 계기로 인생의 깨달음을 얻고서 기도원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유목형의 독특한 인생행로가 파헤쳐지는 것이 핵심인데 그 점을 명확하게 그려내지 못했다.

즉 유목형은 신앙과 믿음을 중시하면서 세상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려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천용덕을 따라서 이상한 범죄마을을 짓는데 참여하게 되고, 철저하게 천용덕의 악행에 이용되면서도 다시 복수를 꿈꾸는 기이한 삶을 선택하게 된다. 이런 독특한 인생을 현실감 있게 그리는 것이 이 영화의 핵심인데, 이 점이 부실하여 영화의 전체적 의미와 가치를 반감시켰다. 그는 카리스마가 있으면서도 신비하면서 맑은 캐릭터여야 하는데 허준호의 이미지와도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원작은 한 술 더 떠서 유목형이 천용덕과의 밀약 하에 자신을 배신한 기도원 사람들을 모두 몰살시키지만, 영화에서는 이것도 악마 역할을 맡은 천용덕의 소행으로만 그려지는 등 단순한 선악 구도로 몰고 간 점도 아쉽다.

영화는 천용덕의 측근 3명의 과거를 묘사하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하지만 이들 모두 악행에 별다른 고민이 없는 태생적 악인으로 나온다. 이런 쓸데없는 시간을 아껴서 유목형 부자와 박인국 검사의 과거와 성장배경, 내적갈등을 다루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특히 만화 원작에서 주인공과 검사는 한국사회를 살아가면서 겪는 모순과 부조리 속에서 심리적 고뇌와 번민을 하는 와중에 이런 모순의 집합체인 이상한 범죄마을을 만나게 된다.

영화의 몰입도와 공감을 월등히 높일 수 있는 이런 심리적 부분을 빠트린 점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또한 여러 가지 이득을 가져올 수 있는 내레이션 기법을 왜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도 의문이다. 주인공의 적절한 내레이션을 통해서 자신이나 다른 인물들의 생각이나 다양한 배경을 설명했다면 많은 시간을 절약하면서도 더욱 깊이 있는 표현이 가능했을 텐데 말이다.

결국 어떤 영화든 등장인물의 짧더라도 농도 있는 과거사나 성장기가 들어가면 영화전체의 현실감과 주제의식이 높아지는데, 이 영화는 이런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끼'는 범죄스릴러적인 요소에 충실하려고 했음에도 마지막의 반전을 제외하고는 소름이 돋거나 머리털을 쭈뼛거리게 하는 오싹함이 부족하다.

▶ 범죄스릴러를 넘어 인간적 고뇌와 철학적 깊이까지 담아야

'이끼'는 범죄영화이면서 만화를 원작으로 한다는 점에서 영화 '타짜'와도 비교되는데, 영화의 줄거리를 거의 바꾸다시피 하면서도 여러 면에서 원작을 능가할 정도로 현실감 있고 흥미로운 내용, 캐릭터, 대사로 무장했던 '타짜'에는 미치지 못하는 완성도를 보여줬다.

'타짜' 외에도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추격자', 등 쟁쟁한 영화들이 관객들의 기대치를 한껏 높여 놓았기 때문에 이런 장르의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은 수작을 만들기 위해 단순한 스릴러를 넘어서 더욱 깊이 있는 인간적 고뇌와 철학적 깊이까지 녹여내야 하는 부담감을 지고 있다.

원작 만화 '이끼'는 한국 사회 또는 현대사 전반을 풍자하는 독특하면서도 함축적인 내용이다. 영화 '이끼'가 대중성에 치중해서 오히려 이런 절호의 기회를 적절히 살려내지 못한 점은 몹시 아쉬울 뿐 아니라 이해하기도 어렵다. 한국 관객들의 기대 수준은 예상보다 훨씬 높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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