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티플레져(guilty pleasure)'는 '좋아한다고 말하기에 부끄러운 개인적인 취향'을 표현한 영어 단어다. 여기에는 주관적인 판단뿐 아니라, 이걸 좋아한다고 하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라는 외부 시선에 대한 걱정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사실 사람들이 고백하는 길티플레져는 아이러니하게도, 부끄럽고 비밀스러운 취향에 대한 고백이라기보다는 남들에게 말할 수 있는 살짝 독특한 (혹은 유치한) 취향 정도로 자리매김했다.
아마 그렇기에 종종 길티플레져로 꼽히는 것들의 범주가 영화거나 드라마일 게다. 이번에 소개하려는 미드는 최근 각종 TV리뷰 블로거들이 부끄러워하지 않고 "올 여름의 길티플레져"로 앞다투어 꼽은 새로운 TV시리즈, 'ABC패밀리'에서 방송 중인 '프리티 리틀 라이어즈'다.
▶ 사라진 소녀, 남겨진 친구들, 그리고 비밀과 거짓말들
'프리티 리틀 라이어즈'가 '길티플레져'가 되는 이유는 '막장'까지는 아니어도 아슬아슬하게 수위를 조절한 자극적인 요소를 곳곳에 뿌려놓은 줄거리에 있다. 배경은 펜실베이니아의 교외마을 로즈우드, 이야기는 천둥이 치는 컴컴한 밤의 오두막에서 시작한다. BFF(Best Friend Forever: 영원한 베스트 프렌드)라 말하기 주저하지 않을 10대 소녀 5명이 파자마 파티 중이다. 몰래 가져온 술을 한잔씩 돌리는 이들은, "친구끼리는 비밀을 공유하는 거야. 그래야 우리가 더 친해지지"라는 앨리슨(사샤 피에터스)의 속삭임에 깔깔 웃다 잠이 든다. 잠시 후, 천둥소리에 놀라 일어난 아리아(루시 헤일)는 스펜서(트로이안 벨리사리오)와 앨리슨이 사라진 걸 알고 해나(애쉴리 벤슨)와 에밀리(섀이 미첼)를 깨운다. 발자국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스펜서 혼자다. "비명을 듣고" 밖에 나갔었다는 스펜서는 앨리슨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시간은 훌쩍 1년 뒤로 넘어간다. 가족을 따라 아이슬란드에서 1년을 보낸 아리아가 돌아오는 것으로 TV시리즈는 본격적으로 이야기의 물꼬를 튼다. 소녀들은 이제 16살이 되었고 앨리슨의 실종 뒤 이상하게 사이가 멀어졌다. 1년 전 앨리슨과 함께 목격했고 비밀로 할 수 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외도 때문에, 고향에 돌아와서도 아리아는 앨리슨에 대한 걱정과 아버지에 대한 실망 등으로 마음 둘 곳 없다. 이삿짐 풀기를 미루고 허기나 때울 겸 찾아간 바에서 아리아는 에즈라(이안 하딩)라는 귀여운 남자에게 첫눈에 반해 키스까지 나누는데 알고보니 에즈라는 아리아가 다닐 학교의 새로운 영어 선생님이라 비밀이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다.
스펜서, 에밀리는 사이가 멀어졌다 뿐 별 다를 게 없지만, 통통하고 수더분했던 해나는 이제 앨리슨이 없는 자리를 채우는 '잇걸(It Girl)'이 되어 있다. 앨리슨처럼 옷을 입고, 화장하고, 앨리슨을 좋아하던 숀과 사귀는 사이다. 그런데 앨리슨이 살던 집에 새 가족이 이사온 날 밤, 앨리슨의 시체가 발견된다. 그런데 소녀들은 슬퍼하기 보다는 불안해하고 두려워한다. 그들이 앨리슨과 함께 저지른 과거의 어떤 잘못, 앨리슨만이 알고 있던 각자의 비밀들이 밝혀질까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A"라는 이름의 발신자가 수상한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두가 모인 장례식장에서 한꺼번에 같은 내용의 문자메시지가 도착한다. "나 아직 여기 있어, 나쁜 년들!"
친구의 실종이 살인사건으로 바뀌면서, 그리고 소녀들 모두가 A로부터 협박에 가까운 문자메시지를 받아왔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아리아, 스펜서, 에밀리, 헤나는 예전처럼 모이게 된다. 그들이 "제나 일"이라고 말하는 앨리슨과 저질렀던 잘못은 사고로 동급생인 제나의 눈을 멀게 한 사건이다. 앨리슨이 어떤 수완을 발휘했는지는 몰라도 그 잘못은 제나의 오빠인 토비가 뒤집어썼고, 소녀들은 그 일에 대해서 숨을 죽인 채 지내왔다. 하지만 앨리슨의 시체가 발견되고, 1년간 휴학했던 제나가 다시 학교로 돌아오면서 소녀들은 이 비밀이 밝혀지지 않을까, 그리고 깊숙이 숨겨둔 자신만의 비밀이 A에 의해 밝혀지지 않을까 조바심을 낸다.
▶ 10대를 위한 막장드라마, 좋아한다 말하려니 부끄럽지만…
사라진 10대 소녀와 남겨진 소녀들이 감추려고 하는 어두운 비밀, 게다가 그 무대는 파란만장한 걸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고등학교. 한국의 그것과 다르게 미드에서 그려지는 고등학교 생활은, 기쁨도, 슬픔도, 좌절도, 성취도 모두 극대화된 굉장히 신선한 세상이다. 그러다 보니 '프리티 리틀 라이어즈'의 주인공들이 고등학생들이라는 것은 이 드라마가 길티플레져가 되는 데는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사건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호들갑 떠는 것은 차치하고도, 술, 섹스, 동성애, 사제간의 사랑, 가정불화 등 이른바 '어른스럽게 대처해야 할 일들'에 대해 고등학생들은 저항력이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10대이기 때문에 감추고 싶은, 그런 비밀들이 만들어내는 불안감은 A가 등장함으로써 두려움으로 바뀌고, 한 꺼풀씩 벗겨지는 비밀과 더불어 새롭게 추가되는 사건들은 '프리티 리틀 라이어즈'의 긴장을 매번 최고조까지 높인다.
'가십걸'과 '나는 네가 지난 금요일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등 여름용 청춘호러물이 동시에 떠오르는, '프리티 리틀 라이어즈'는 사라 셰퍼드가 쓴 동명의 영어덜트 소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TV시리즈다. 하지만 순서를 잘 따지면, 소설 자체가 TV시리즈의 제작을 위해 쓰여졌기 때문에, 닭이 먼저다 달걀이 먼저다를 따지기는 어렵다. 다만 이미 8권까지 완간이 되어 모든 줄거리와 스포일러가 알려진 이 소설이 드라마로 만들어져 인기를 끄는 것은 예상 밖의 신선한 결과다. 처음에 'ABC패밀리' 역시 큰 기대가 없었는지 10개 에피소드로 시즌1을 주문했는데, 드라마가 예상외로 선전하자 12개 에피소드를 추가로 주문해 시즌1이 22개 에피소드로 확대된 전력도 있다. 드라마는 이미 소설의 첫 1, 2권에 담긴 내용을 압축해서 파일럿에 보여주면서 시작했고, 미리 읽어본 소설의 줄거리에 따르면 갈수록 이야기는 복잡해지고, 등장인물들도 많아질 예정이다.
이미 책으로는 출간이 완료된 이야기가 TV로 인기를 끌 수 있는 이유는, 원작의 인기를 TV라는 미디어를 통해서 그럴듯하게 시각화했기 때문일 거다. 사제간의 사랑이라는 낯간지럽고 금기시 되는 주제는 예쁜 여학생이 빗줄기 속에 서있을 때 짠-하고 나타난 선생님의 차에서 키스로 마무리하면서 말랑말랑 간질간질하게 그려졌고, 언니의 약혼자에게 호감을 느껴 잠시 키스까지 했던 스펜서는 가족 중 찬밥신세가 되면서 시청자의 공분을 산다. 자신 없는 여자친구가 남자친구의 사랑을 섹스로 사보려고 하는 것도 나름의 판타지다. 자극적인 주제와 아슬아슬하게 미성년자 관람이 가능한 장면들 역시 "하고 싶은 데 하면 안 되는 일"이 더 많은 10대들에게는 금단의 영역이기에 훔쳐보는 재미도 쏠쏠할 듯하다.
▶ '뱀파이어' 없는 청춘물, 으스스한 분위기로 여름 시청자들 공략
처음에 '프리티 리틀 라이어즈'를 보고 들었던 생각은, 'CW'의 인기시리즈 '가십걸'을 쫓으려는 '미투(me too)' '가십걸'인 줄 알았다. 하지만 오히려 이 드라마는 '미투' '위기의 주부들'을 표방한다. 시리즈의 제작의도를 보면 "10대들이 볼 수 있는 '위기의 주부들'을 만들고 싶었다"고 밝히고 있는데, 그러고 보니 메리 앨리스의 예상치 못한 자살로 시작한 '위기의 주부들' 역시 절친했던 친구의 죽음을 둘러싼 4명의 여자들과, 그들이 간직한 어두운 비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마 그 설정을 그대로 가져와 주인공들만 10대로 바꾼다면 '프리티 리틀 라이어즈'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 두 가지가 궁금해진다. 첫째로 소설에서 이미 밝혀진 이야기가 드라마에서 어떻게 변주될 것인가? 그 뒤에 이 드라마는 종영할 것인가 아니면 '위기의 주부들'처럼 새로운 인물과 새로운 구도를 대입하며 장수할 것인가? 아마 그에 대한 결정은 시청률이 좌지우지하겠지만, 일단 이 뻔한 드라마의 익숙한 세팅이 만들어내는 부끄러운 즐거움에 빠져보련다.
하나 더, 여름이라 그런지, 확실히 청춘물이 대세다. 수사물로 점철된 정규시즌이 마무리되고, 케이블 채널의 약진이 기대되는 요즘 미국 TV와 영화 시장의 트렌드는 아무래도 청춘물 아니면 뱀파이어, 그것도 아니면 뱀파이어가 나오는 청춘물(곧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3편인 '이클립스'가 개봉한다)임에 틀림없다. 시청자들만큼 까다로운 고객도 없다. 매번 같은 이야기에 감동하면서 동시에 매번 새로운 것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프리티 리틀 라이어즈'는 '뱀파이어'에 슬슬 질리기 시작한 시청자들에게는 가뭄에 단비 같은 이야기였을지 모른다. 후덥지근한 여름날씨를 잊을 수 있도록 으슬으슬 공포영화 분위기도 연출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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