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1호선에 \'개그맨 김대범 바보\'라는 광고를 낸 \'대빡이\' 김대범.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개그맨 김대범 바보' -천재 대범-
초등학교 담벼락에 적힌 낙서가 아니다. 한 달 전부터 서울 지하철 1호선 출입문마다 나붙은 광고다. '문에 기대지 마시오. 손을 짚지 마시오'라는 익숙한 글씨 옆에 빨갛고 굵은 글씨로 눈에 띄게 적혀 있어서, 본 사람들은 '개그맨 김대범이 누구야?'라고 갸우뚱하게 된다.
'낙서'의 주인공 김대범(31)은 KBS 2TV 개그콘서트에서 '마빡이' 정종철의 옆에서 신나게 이마를 두들기던 '대빡이'다. 그저 그런 '안 웃긴 개그맨'으로 잊혀져 가던 그가 대중에게 자기 이름을 다시 알리고자 이런 비싼 수단을 쓴 걸까. 하지만 광고치곤 문구가 너무 심심했다. 직접 그를 만나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 "공연 홍보? 입소문 아닌 광고는 소용없어요."
김대범을 만난 곳은 서울 서대문구 서교동에 위치한 한 개그전문 소극장. 그는 지난해 9월 이 곳에 자신의 이름을 딴 '김대범 소극장'을 열고 제작사 겸 희극 배우로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다. 개관하며 직접 뽑은 단원 20명과 함께 '당신이 주인공'이라는 코믹 체험극을 하루 세 번, 휴일엔 다섯 번씩 무대 위에 올리고 있다.
김대범은 "광고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걱정했다"며 "저는 그걸 '무인 개그'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3개월 간 지하철에 붙어 있을 광고는 한 장당 4000원. 총 1000장을 찍어냈다. 에누리 조금 받아 1400만원이 든 '비싼' 장난인 셈.
개그맨 김대범이 1400만원을 들여 한 서울 지하철 1호선 출입문 광고. 김대범은 광고가 아니라 ‘무인 개그’라고 설명했다. "출퇴근 시간 지하철이 얼마나 삭막해요? 어떻게 하면 승객들을 웃게 해줄까 하다가 이런 낙서 같은 장난이 떠올랐어요. 머리 속에 떠오른 장난은 꼭 해야 직성이 풀리거든요. 극장 광고라고 오해하는 분도 있지만 공연은 입소문이 나야 관객이 들지요. '지킬 앤 하이드'처럼 TV 광고를 빵빵 때리지 않는 한 광고를 해봤자 효과는 별로 없어요."
알고 보니 김대범의 장난은 내력이 깊었다. 초등학생 때는 학원 차에 의자를 쇠사슬로 묶어두기도 하고, 친구들을 웃긴답시고 선생님께 한대 씩 맞을 때마다 괴상한 표정을 지어 보기도 했다. 잘못하면 교사의 부아를 더 돋울 만한데 온 학교에 일치감치 '개그맨이 될 애'라고 소문이 나서 괜찮았다고.
개그맨이 된 후에도 휴일 학교에 찾아가 '대빡이 왔다간다'라고 크게 써놓고 증거사진을 찍어 홈페이지에 올렸다. '개그콘서트' 대기실에서는 후배들의 인사 받기에 '지쳐'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 '김대범 복제인간'이라고 써놓은 피켓을 목에 걸게 하고 자기 대신 인사를 받게 했다. 인터뷰가 있던 날도 기자들과 악수하는 척하면서 모형 바퀴벌레를 슬쩍 쥐어주는 장난을 치기도 했다.
"TV에서 웃기는 재능이 없다보니 길거리로 나온 셈이죠. 지하철에 '장난'을 하면서 걱정도 많았어요. 주변에서 돈을 그렇게 쓰냐고 한심하게 보는 사람들도 있었거든요. 인터넷에서도 안 좋은 소문이 날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재밌어 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 기분 좋았어요."
홍대 정문 인근에서 '김대범 소극장'을 운영 중인 개그맨 김대범.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 관객과 배우 뒤바뀌는 코믹 체험극 '당신이 주인공'
그가 공연하는 '당신이 주인공'은 관객 일부가 즉석에서 배우가 되는 체험 연극이다. 공연은 관객들이 객석에 앉는 순간 시작된다. 무대 앞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 채팅 창에서 "왼쪽 두 번째 줄 커플 스킨십 하지 마!", "헤어스타일이 멋져. 추노 이대길이야.", "지켜보고 있다. ㅋㅋㅋㅋ" 등의 말장난이 실시간으로 흘러나온다. 이윽고 '감독'역을 맡은 김대범이 나타나 관객들에게 배역과 대사를 나눠주고 다른 배우들과 즉석에서 공연을 하게 한다. 배우들은 애드립으로 관객의 '연기'를 받아치는 특이한 공연이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그때그때 포맷도 살짝 바뀐다. 납량특집으로 배우들이 귀신 분장을 하고 관객을 맞는 아이디어도 검토 중이다.
"우리가 열심히 아이디어를 짜도 현장에서 일어나는 즉석 해프닝을 이길 방법이 없더라고요. 배우가 실수를 하면 관객들 반응이 폭발적인 거예요. 열심히 짠 개그가 이런 실수 하나를 이길 수 없나 자괴감이 들었어요. 예능도 리얼 버라이어티가 인기를 얻으니 '리얼'에 대한 자극이 한 번 더 왔어요. 그러다 관객을 이용하는 연극이 기억났어요. 그래서 관객과 배우의 역할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시행착오는 있었다. 작년에 첫 시사회를 하고는 너무 재미없어서 관객들에게 사과를 20번 정도 했다. 관객들을 자연스럽게 유도하지 못한 것. 남 앞에 나서길 싫어하는 한국인을 끌어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고민 끝에 관객들에게 대본을 나눠주고 다시 연기하게 했더니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수정하면서 발전한 게 지금의 '당신이 주인공'이다. 입소문을 내기 위해 공연을 보고 돌아가는 관객에게는 할인권을 준다. 그 할인권으로 공연에 오는 관객이 매회 30%정도를 차지한다. 15번이나 본 관객도 있다. 배우로 인연을 맺은 관객들은 네이버와 싸이월드 카페를 통해 끈끈한 정을 이어가고 있다.
20명의 단원들은 모두 신인이다. 극 자체로 평가받고 싶어서 기성 개그맨은 쓰지 않는다고. 김대범은 "한 달 동안 오디션을 하면서 인성부터 실력까지 두루 지켜본다"며 "의지가 나약해서 지각하거나 나오지 않을 사람도 추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친구들이기 때문에 열정도 실력도 대단하다"고 자랑했다.
"수익은 못 가져가도 단원 월급은 밀리지 않아요. 2009년 시작할 때 멤버들이 전원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 만큼 후배들이 보람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단원들이 저를 믿고 따라와 준다는 것도 큰 기쁨입니다."
▶ 결혼식 사회본 종자돈으로 시작한 '당신이 주인공', 일본 진출 하고파
김대범이 공연계와 인연을 맺은 것은 4년 전이다. '대빡이'로 인기를 얻었을 때 여름휴가 동안 비는 극장을 대관해 공연을 올렸다. 순수익이 700만 원이나 됐다. '내 길이 여기 있다'고 판단한 그는 겨울에도 같은 공연을 올렸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속된 말로 '쫄딱' 망했다. 김대범은 여름 공연이 성공한 것은 '마빡이' 코너의 후광 덕임을 그 때 알았다. 이 후에도 몇 차례 공연을 올렸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다 연예인 사회자 섭외 대행사 '레드 펌킨'을 같이 하던 가도현 대표의 설득으로 '김대범 소극장'을 연 것이다. 종자돈은 결혼식 사회를 하며 번 돈으로 충당했다. 그는 '레드 펌킨'을 운영하며 한 때 결혼식 사회로 월 1500만원 수입을 올렸다. 주식으로 5억원을 날린 적도 있지만, 다시 꾸준히 행사를 뛴 덕분에 극장을 열 정도는 됐다.
"마지막이라고 맘먹고 덤볐습니다. 짝퉁 개그콘서트가 아닌 진짜 공연을 해보자고 한 거죠. 다행히 지금까지 한 번도 인터넷에 악성 댓글이 올라오지 않았고 적자도 없었어요. 극장을 연 뒤부터 쭉 흑자입니다."
김대범은 '당신이 주인공'으로 일본에 진출할 목표를 세우고 준비 중이다. 데리고 있는 배우들과 함께 해외 공연을 떠난다기보다는 공연 포맷을 수출할 생각이다.
"그 나라만의 개그 코드를 담아서 공연하도록 현지 배우들을 캐스팅할 계획입니다. 지방에도 김대범 소극장을 세우고 싶고, 지하철 광고보다 스케일이 더 큰 장난도 해보고 싶고…."
지금은 극단의 대표이자 공연기획자 겸 배우로 전방위 활동을 하지만, TV 브라운관을 다시 누비고 싶은 미련은 없을까. 김대범은 "안 하는 게 아니라 아이디어가 고갈돼서 못 한다"며 어색하게 웃었다.
"개콘 시청자 중에 김대범의 개그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어도 재미있는 개그를 기다리는 사람은 많다고 생각합니다. 시청자들의 환영을 받을만한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저도 다시 개콘 무대에 서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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