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서나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명문대 출신일수록 소득이 높다. 또 책임 있는 위치에서 일한다. 그렇지만 한국처럼 ‘학벌 디바이드’가 심한 나라는 없다.
통계청에 따르면 대졸 학력 이상 가구주의 월평균 가계소득은 498만7000원으로 중졸 이하(242만7000원)의 두 배를 넘었다. 전문대졸(380만2000원)과 고졸(342만5000원)도 명확한 차이를 보였다. 대졸끼리도 학벌에 따라 격차가 컸다. 서강대 경제학과 문혜영 씨의 석사학위 논문에 따르면 조사대상 대졸자 333명을 수능 성적에 따라 12등급으로 분류한 결과 최상위 1등급의 월평균 초임 임금은 201만4000원이었지만 12등급은 122만6000원이었다.
정말 심각한 것은 한국에서는 학벌만이 중요할 뿐 실질적 학력, 전문성, 창의성, 문제해결 능력 등이 뒷전이라는 점이다. 수능 성적이 남은 인생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생의 계급이 일찌감치 결정되면서 대입 이후에는 노력에 따른 보상의 차이가 크지 않다. 자기계발의 인센티브가 줄어드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사회적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패자부활전을 활성화하는 등 인재 발굴의 경로와 단계를 다양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 모두 대학 간다…학력 인플레이션
‘학벌 디바이드’의 부작용 중 하나는 학력 인플레이션. 한국에서 고교 졸업생의 대학 진학률은 2008년 기준 83.8%. 미국(65%) 일본(46%) 등 주요 선진국보다 훨씬 높다. ‘대학에 가고 보자’는 풍조 때문이다.
자연히 대졸자 대상 일자리는 턱없이 부족하다. 고용정보원 보고서에 따르면 2008∼2018년 4년제 대졸자에 대한 신규인력 수요(예측)는 161만 명인데 공급인원은 178만5000명이다. 수요인력의 10.9%인 17만5000명이 초과 공급되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인력시장에서 청년실업과 하향취업이 굳어졌다. 지난해 서울 강서구가 환경미화원 5명을 모집했는데 지원자 63명 중 23명이 대졸자였다. 물리학 박사도 한 명 있었다.
또 대졸자는 과잉 양산되지만 산업계에 필요한 기술인력은 태부족이다. 이 때문에 산업계는 아예 자체 인력양성 시스템을 가동하기도 한다. 대한상공회의소 인력개발원은 지난해 교육생 2019명 중 1989명(98.5%)이 취업에 성공했다. 1994년부터 올해까지 16년째 취업률이 90%가 넘는다. 김용복 대한상의 능력지원팀장은 “수요자가 원하는 것을 가르쳐야 취업률이 높고 이직률도 낮다”고 말했다.
학벌 디바이드가 학력 인플레를 낳고, 그 때문에 인력수급의 미스매치가 구조화되는 등 인력양성 시스템에 극도의 비효율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 학생은 ‘입시기계’로
초중고교 교육 인프라가 학벌 쌓기 과정으로 전락하다 보니 학생들은 ‘입시기계’가 되고 있다. 고3병, 중3병에 이어 초등학생까지 입시 스트레스에 노출된 지 오래다. 초등학교 6학년이 중2 때 배우는 인수분해를 공부하고, 중1이 고등학생용 ‘수학의 정석’을 푸는 선행학습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선행학습의 특징은 ‘왜’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문제를 빨리 푸는 요령’을 가르친다는 점이다. 배종수 서울교대 교수는 “한국은 수학도 암기 과목으로 생각하는 바람에 논리적 사고력이 아닌 지구력이 수학 성적을 가른다”며 “3+2×4의 답이 11이라는 것은 알아도 왜 곱하기를 먼저 하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학생은 드물다”고 지적했다.
기본바탕 없이 요령만 터득했기 때문에 해외유학생의 경우 대학 진학 이후에는 현지 학생들에게 밀린다. 학업에 적응하지 못해 U턴하는 사례도 많다.
획일적인 입시 공부의 폐해를 막아 보려고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했지만 이 역시 ‘입시기계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서는 요즘 초중학생을 대상으로 입학사정관전형용 ‘스펙’을 관리해주는 컨설팅학원이 인기다. 학생이 집중적으로 공부할 과목과 준비할 자격증 등을 상담해주는 비용은 한 달에 35만∼50만 원이다. 상담 1시간에 60만 원인 곳도 있다. 초중학생 특허 학원도 등장했다. 한 특허학원장은 “특허는 정부기관인 특허청에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학생이 준비할 수 있는 최고 스펙 중 하나”라며 “입학사정관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 ‘루저’가 된 아이들…무너진 학교
모든 중고교생이 ‘입시열차’를 탈 수는 없다. 과도한 부담에 짓눌려 입시경쟁을 포기한 학생들은 ‘루저’라는 자괴감 속에 우울한 학창생활을 하고 있다. 나름대로 행복하고 의미 있는 기간이어야 할 성장기가 입시를 포기하는 순간 ‘의미 없는 시간’이 돼버리는 것.
경기 안산시의 한 중학교 교실에서 40명의 학생 중 대학 진학을 포기한 아이가 20명이 넘는다. 이 중 10여 명은 학교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는 것이 나름대로 큰 낙이다. 하루 두 갑 이상 피우는 ‘골초’도 있다. 이 학교의 김모 교사(31·여)는 “요즘에는 대학 입학 여부가 중학교 때부터 갈린다”며 “일찍 대학을 포기한 아이들은 스스로를 ‘IBM(이미 버린 몸)’이라 부른다”고 밝혔다.
건강한 민주시민을 양성하기 위한 ‘제도로서의 교육과 학교’가 무너져버린 것이다.
입시열차에 탔다 해도 획일적인 입시지옥에서 살아간다. 매년 반복되는 시험 후 학생자살은 이 같은 불행의 결정판이다.
100% 완벽한 교육시스템을 갖춘 나라는 없다. 미국은 부실 공교육이 사회적으로 큰 문제다. 학벌 디바이드를 어느 정도 극복했다는 독일에서조차 최근 교육개혁 논의가 거세다. 그렇지만 명문대 진학만이 유일한 목표인 사회, 그 대열에서 탈락하면 ‘루저’가 되는 사회는 비(非)정상이다.
이성호 중앙대 교육학과 교수는 “교육의 본질은 바른 사람, 유용한 사람을 키우는 것”이라며 “각자의 적성을 살려 바른 인재를 키워낼 수 있도록 근본적 교육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윤석만 기자 sm@donga.com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최예나 기자 ye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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