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집중분석]드라마캐릭터열전② 원조 ‘나쁜 남자’, 차무혁의 흔적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8월 12일 11시 30분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비극적 운명이었다. 하지만 사랑을 품에 안고 세상을 떠난 그 남자는 지금 호주의 공원묘지에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묻혀 있다.

짧은 생애를 사는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머니가 차려준 식탁 앞에 앉은 그 남자. 끝까지 아들을 알아보지 못한 어머니에게 그는 가슴 절절한 사모곡을 남겼다.

"어머니, 다음 세상에서도 꼭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나겠습니다. 그 때는 꼭 어머니의 자랑스럽고 착한 아들이 될게요. 사랑합니다, 어머니. 단 한 순간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어머니, 낳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자신이 입양된 호주의 공원묘지에 묻힌 비극적 운명의 남자 차무혁. 2004년 싸늘한 바람이 왠지 모르게 가슴을 아리게 만드는 가을과 겨울에 비극적 사랑 이야기로 시청자의 가슴을 울렸던 KBS 미니시리즈 '미안하다, 사랑한다'(이경희 극본, 이형민 연출). 주인공 차무혁(소지섭 분)이 라면을 먹으며 마음속으로 오열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버지 없는 부끄러운 존재로 태어나 인기 여배우로 승승장구하던 어머니 오들희(이혜영)의 배우 생명을 위해 죽음으로 위장돼 해외로 입양된 차무혁. 낯선 땅에서 여행자들의 지갑을 털며 양아치처럼 거칠게 살아가던 차무혁은 연인이자 어머니처럼 자신을 품어주던 한국인 입양아 문지영(최여진)이 사랑보다 돈을 선택하면서 또 다시 버림받는다.

첫 번째 버려짐이 인기 여배우였던 어머니의 '명성'을 위해서였다면 두 번째 버려짐은 사랑하는 여자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는데 필요한 '돈' 때문이란 사실은 차무혁의 비극적 운명을 알리는 전조였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의 품속으로부터 내쳐진 상황은 그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인기 여배우였던 어머니가 배우로서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살신(殺身)이라 할만 했다.

차무혁은 돈을 좇아 자신을 버리고 떠난 문지영의 결혼식장에서 총격 사건이 일어나자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지다가 머리에 두 발의 총을 맞고 쓰러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또 다시 살신(殺身)의 상황으로 몰아간 것이다. 한 번으로 부족해 두 번씩이나 버림받은 차무혁은 이렇게 비극적인 운명을 타고난 남자였다.

차무혁은 자신을 버린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원망할 줄 모른다.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도입부가 해외 입양아의 비참한 실태를 취재하던 제작진이 자신을 버린 어머니나 고국에 대한 원망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며 원망하지 않는다는 차무혁의 인터뷰 장면을 삭제하며 시작한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차무혁은 어머니가 자신을 버린 것은 가난 때문이었을 것이라 보듬으며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어머니에게 맛있는 갈비는 물론 좋은 옷과 예쁜 집을 진심으로 사주고 싶어 한다. 비록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어 양아치로 살아가고 있지만 얼굴 한 번 못 본 어머니를 생각하는 애틋함이 그 누구보다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순수한 남자 차무혁의 면모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처럼 차무혁은 짧은 생을 마감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 몸을 날렸다가 머리에 총을 맞은 차무혁이 대수술에도 불구하고 끝내 숨골 부근의 총알을 제거하지 못해 죽음의 시간을 맞이해야 하는 또 다른 비극에 처한 것이다.


자신의 사랑을 빼앗은 마피아 보스의 생명을 구해준 보답으로 차무혁이 엄청난 액수의 돈을 건네받는 상황은 그의 비극적인 운명처럼 대단히 아이러니하다. 사랑하는 여자가 떠난 곳에서 허전함과 절망감에 빠져 있던 차무혁은 어머니의 나라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른다. 그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돈을 가난 때문에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위해 사용하기로 결심하고 어머니를 찾아 나선 것이다.

사랑과 생명을 잃어버린 차무혁이 그 근원을 찾아 돌아온 어머니의 땅 한국은 제법 괜찮은 곳이었다. 적어도 수소문 끝에 찾아간 어머니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화려한 집에서 보석 같은 아들과 행복하게 살고 있는 어머니 오들희와 대면하는 순간 차무혁은 끔찍한 절망감과 지독한 배신감에 휩싸인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려지는 현실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던 차무혁이었지만 어머니에 대한 배신감만은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복수를 결심한다. 비록 부모님의 사랑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세상에 버려진 존재였지만 그래도 사랑만이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음을 간절히 믿었던 차무혁이 더 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 어머니와 대면한 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복수를 계획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피와 살을 나눠준 어머니를 향한 차무혁의 복수심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잔인한 복수의 화신으로 자신의 남은 생을 불살라버리려는 차무혁의 행동은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를 향한 절규인 것이다. 비극적 운명 속에서도 사랑의 진정성을 믿었으나 그 사랑으로부터 배신당한 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그에게 연민을 느꼈던 것도 그래서이다.

껄렁거리는 몸짓으로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말꼬리가 짧은, 그래서 대단히 불량스러워 보이지만 사랑을 잃어버린 상처로 혼자 눈물 흘리는 가련한 남자 차무혁은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게 복수하기 위해 어머니가 그토록 아끼는 보석 같은 아들이자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인 최윤(정경호)에게 접근한다.

어머니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로 가슴에 품고 있는 아들을 파멸시킴으로써 죽음으로도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어머니에게 안겨주겠다는 그의 계획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잔인한 복수 방법이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최윤에게 접근하여 마음을 사로잡아 매니저로 취직한 뒤 차무혁은 최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을 빼앗는다. 최윤이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을 빼앗아 그로부터 멀어지게 한 뒤 그녀를 비참하게 버려 최윤을 미치게 만든다. 그런 아들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오들희의 모습을 지켜보며 차무혁은 복수의 강도를 점점 높여 간다.

그의 복수는 사랑하는 여자에게 버림받은 고통으로 빗길을 과속 운전하다 교통사고를 당한 최윤이 심장이식수술을 받아야만 하는 위기에 처하면서 절정에 이른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게 복수하기 위해 최윤에게 심장을 이식해 준 뒤 자신의 존재를 알려 어머니가 평생 죄의식에 사로잡혀 살게 만들겠다는 차무혁의 복수 계획이 마침내 실행에 옮겨지는 순간이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복수의 화신으로 변모하던 차무혁은 그러나 연정(戀情)과 모성(母性)을 함께 갖춘 여자 송은채(임수정)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서 모든 걸 용서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상처를 진심으로 위로해주는 송은채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순수한 남자. 사랑하는 여자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밥 먹을래, 나랑 뽀뽀할래! 밥 먹을래, 나랑 잘래! 밥 먹을래 나랑 죽을래!"라며 거칠게 몰아세우는 감정 표현이 서투른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하느님을 찾는다.

"하느님, 당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나, 당신에게 약속합니다. 송은채, 내게 남은 시간 저 여자만 내 곁에 두신다면, 저 여자로 내 남은 시간을 위로해준다면, 더 이상 날 건드리지 않는다면, 그냥 여기서 다 멈추겠습니다. 증오도 분노도 다 쓰레기통에 처넣고, 조용히 눈 감겠습니다. 하느님, 나, 당신에게 약속합니다."

사랑하는 송은채와 함께라면 증오도 분노도 모두 버리고 조용히 눈 감겠다는 차무혁의 독백은 그의 심리 변화는 물론 사랑과 죽음이 혼재하는 비극적인 상황을 동시에 보여준다.

송은채를 통해 사랑의 진정성을 회복한 차무혁은 마침내 자신이 어머니로부터 버려진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면서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자신의 심장을 최윤에게 이식해주고 죽음을 맞이한다.

어머니를 향한 가장 잔인한 복수 방법으로 처절하게 파멸시키려 했던 최윤이 실은 태어나자마자 죽은 자식에 대한 죄책감으로 입양해서 보석처럼 키운 동생이었음을 알게 되면서 자신을 향한 어머니의 절절한 사랑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자리한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차무혁은 자신의 존재를 어머니에게 알리지 않고 홀로 짧은 생을 마감한다.

비극적인 운명이었지만 그래도 차무혁은 외로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를 사랑한 어머니 오들희가 있었고 그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그를 사랑해준 송은채가 죽음으로 영원히 그의 곁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미안하고 고마운 감정을 표현할 줄 몰랐지만 사랑하는 여자의 가르침대로 "고맙다, 요!"라며 어색한 존댓말을 구사하는 차무혁은 맑고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이다. 그런 그가 어렵게 상봉한, 정신지체장애를 앓고 있는 이란성 쌍둥이 누나와 함께 간 노래방에서 유일하게 아는 노래라며 '애국가'를 부르는 장면은 가슴 메이는 슬픔을 동반하면서 우리 사회의 해외 입양에 대한 성찰을 유도하였다.

차무혁은 그렇게 우리 곁에 머물다 짧은 생을 마감하고 떠나갔다. 연인 사이는 물론 부모자식 관계에서조차 '조건'이 앞서는 2000년대 우리 시대의 '사랑 방정식'에 경종을 울리며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 착한 남자가 바로 차무혁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해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외치며 오토바이를 타고 폭풍처럼 거리를 질주하던 그의 마지막 모습이 아직도 눈에 어른거린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드라마평론가 drama@cnu.ac.kr
  • 좋아요
    0
  • 슬퍼요
    1
  • 화나요
    0

댓글 1

추천 많은 댓글

  • 2010-08-12 12:34:57

    이런 드라마가 요즘 트랜드 인가요 식상한 스토리 아닌가요 조금더 진보한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인물과 스토리 배우에 치중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1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