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열전3 전체 9편 중 지금까지 8편의 작품이 소개됐습니다. 그중에 최고의 작품을 하나 뽑으라면 단연 '경남 창녕군 길곡면'(연출 류주연)을 뽑겠습니다. 이 연극은 그만큼 대본, 연기, 연출의 3박자가 뛰어납니다. 우리 시대 '아기'를 갖는다는 것의 사회경제적 의미를 파고든 주제의식도 음미할만하지만 무엇보다 연극적 재미가 뛰어난 작품입니다.
제목만 보면 창작극 같지만 이 작품은 독일의 배우이자 극작가인 프란츠 크사버 크뢰츠의 '오버외스터라이히'(1982년)를 한국적 상황에 맞게 번안한 연극입니다. 오버외스터라이히는 독일인들에게도 어딘지 낯선 지역명이라고 합니다. 연극 후반부 관객에게 극 내용이 현실에 깊이 뿌리박힌 내용임을 환기시키기 위한 브레히트 식 '낯설게 하기'의 일환으로 쓰인 것입니다.
경남 창녕군 길곡면은 2007년 초연을 준비할 당시 남자 주인공 이주원 씨가 추천한 지명이라고 합니다. 지난해 공연에선 길곡면 주민들이 자신들 동네 이름을 써준 것이 반가워 집단상경해 관람했다가 낙담해 돌아간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연극에서 이 지명은 맨 마지막에 남편이 낙태요구를 거부한 아내를 살해한 사건의 발생지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2인극 \'경남 창녕군 길곡면\'에서 아스파라거스 대신 파를 곁들인 스테이크를 먹으며 행복해하는 선미(김선영)와 종철(이주원) 부부. 연극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형마트서 일하는 결혼 3년차 맞벌이 부부의 2인극입니다. 원작자 크뢰츠는 현실감을 높이기 위해 꼭 사투리를 써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마침 선미 역의 김선영 씨와 종철 역의 이주원 씨가 모두 경상도 출신이라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는데 이 점도 제목의 지명을 선택하는데 영향을 준 것이지요. 경상도 사투리를 쓰면서 타 지방 지명을 갖다 쓸 경우 파장을 고려한 것입니다.
연극의 초반부는 선미와 종철 부부의 일상이 사실적이면서도 해학적으로 묘사됩니다. 감탄할만한 점은 독일 원작을 거의 느낄 수 없을 만큼 한국화한 점입니다. '무한도전' 필리핀 특집을 보며 동남아 섹스 관광을 풍자한 것은 1970~80년대 독일의 동남아 섹스 관광 붐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 아스파라거스를 대신해 파를 곁들인 스테이크를 썰으며 "이거 미국산 아니라 호주산이야"라고 자기위안을 삼는 모습에선 한국사회의 광우병 트라우마를 읽을 수 있습니다.
중산층에 편입하고자는 욕망도 지극히 한국적입니다. 직장동료가 구입한 SM3 신형차를 자신들의 마티즈와 비교하며 "맞먹으려면 아반떼 정도는 돼야지. 2000cc, 스텝 게이트, 가슴을 울리는 서라운드 시스템"이라고 너스레를 떠는 장면에선 폭소가 터집니다. 발렌타인데이 때 한강변 레스토랑에서 한껏 분위기를 내면서 "역시 강남이 고기가 좋아"라고 으스대는 모습에서도 가끔은 속물적인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관객을 무장해제 시킨 연극은 서서히 수렁에 빠져듭니다. 예기치 않았던 선미의 임신입니다. "이제 자긴 아빠가 되고 난 엄마가 돼"라고 기뻐하는 아내 선미를 향해 남편 종철은 "우리가 그래 조심했는데, 서로"라며 싸늘한 반응을 보냅니다. 서로의 사랑이 식어서가 아닙니다. 아기가 싫어서도 아닙니다. 아기를 낳게 될 경우 직면하게 될 차가운 현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임신을 축복이라 생각하는 선미와 재앙이라고 생각하는 종철의 갈등. 선미 : 우리는 삶의 현실을 신뢰함으로써 앞으로는 더 나은 미래가 올 것을 믿어야 돼. 난 아무 짓도 안한다. 빙 돌려 말할 필요 없고. 난 아가 다 느껴져. 종철 : 말도 안 되는 소리한다. 선미 : 집중하면 다 느낄 수 있다. 여자는. 종철 : 세 달도 되지 않았어. 그건 개구리만 할 거야. 선미 : 개구리는 자기도 느낄 수 있어. 손바닥에 그것을 올려놓으면. 종철 : 자긴 손바닥에 올려놓을 아무것도 없어. 니는. 선미 : 태아도 우리와 같은 한 생물체입니다. 난 포기하지 않는다. 종철 : 저놈의 고집, 고집
아기를 뱃속에 품은 선미는 모성본능에 투철해 그 차가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부양의 의무를 강하게 느끼는 종철은 그 현실에 가위 눌립니다. 종철은 "아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아빤가 이게 중요한 기지"라며 그 무거운 현실의 고민을 토로합니다. 뱃속의 아기는 보육원에 보낼 형편도 안 되고 그렇다고 아내가 직장을 그만두면 생계조차 어려운 현실만 일깨우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아빠가 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존재론적 고민까지 불러일으킵니다.
여기서 최고의 블랙코미디가 펼쳐집니다. 부부는 계산기를 두드리며 아기를 낳을 때 들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자신들의 한달 지출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는 지 구체적 계산을 펼칩니다. 아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월 200만원이 못되는 남편의 수입에 의존해 과연 아기를 키울 수 있는가. 담배도 끊고, 케이블TV도 끊고, 외식도 끊고, 미장원 갈 돈도 줄이고 한달에 영화 한편 볼 돈도 줄이고 아무리 몸부림 쳐도 한달 생활비 193만5000원이 남습니다. 사실 눈물 겨운 이야기인데 부부의 대사가 너무도 현실감이 넘쳐 계속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자 그렇게 남은 6만5000원으로 아기 양육비를 충당할 수 있을까요.
아기를 낳는 문제로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 빠지는 종철. 왜 대한민국이 세계 최저 출산국가가 됐는지 그 현실을 연극은 너무도 절절하게 보여줍니다. 축복이 되어야할 아기가 저주가 될 수밖에 없는 비극적 현실을 연극은 어릿광대 같은 웃음으로 펼쳐놓습니다. 이명박 정부 집권 후반기 키워드가 '친서민정책'이라는데 새로 보건복지부 장관이 되실 분 아니 총리가 되실 분도 꼭 이 연극을 관람하시길 권해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초연 때부터 선미 역을 맡아온 김선영 씨(34)는 현재 임신5개월입니다. 첫 아기여서 처음엔 출연을 주저했지만 임신 5, 6개월 때는 적당히 운동을 하는 것이 좋다는 의사의 권고도 있고 배역에 대한 애착도 커서 출연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무대에선 거의 티가 나지 않지만 실제 뱃속에 아기를 품고 연기를 하다보니 극중 배역과 혼연일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히 작품은 뱃속의 아기를 어떻게든 낳아보자는 희망을 안고 끝납니다.
실제 임신 5개월의 몸을 이끌고 낙태에 맞서 아기를 지키려는 모성애를 사실감 넘치게 담아낸 김선영 씨. 2007년 초연 때부터 4년간 호흡을 맞춰온 김선영-이주원 씨의 연기는 너무도 실감이 나서 두 사람이 부부가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할 정도입니다. 연극열전에선 원래 이들 외에 스타 배우를 더블 캐스팅해 공연을 진행할 계획이었지만 두 사람의 연기궁합에 필적할 대타를 마련하는데 실패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찰진 연기를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어찌 보면 심각한 사회적 주제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웃음으로 전달한다는 점에서 의미와 재미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갖춘 연극입니다. 아무리 앵콜 요청이 들어와도 김선영 씨가 출산에 들어가면 당분간 볼 수 없는 연극이니까 늦기 전에 꼭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3만5000 원. 9월19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소극장. 17, 18일과 24, 25일엔 오전 11시에도 공연. 02-766-6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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