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났으면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상상, 내가 살날의 기한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이에 대한 수많은 픽션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개인적으로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한 책 중에 최고를 꼽으라면, '나니아 연대기'의 원작자인 C. S. 루이스의 '헤아려 본 슬픔'을 꼽고 싶다. 배우자의 죽음 뒤에 써내려간 에세이 혹은 일기 형식의 자전적인 고백인데, 죽음에 대해 꾸미려 하지 않은 솔직한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진정성 때문이다.
이번에 소개하려는 미드 역시 죽음을 앞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더빅C' (The Big C)라는 제목으로 케이블 채널 '쇼타임'에서 지난 8월16일 방영을 시작한 이 드라마는, 흑색종 4기를 진단받은 40대 여성이 어떻게 자신의 병을 받아들이고, 또 어떻게 생활을 바꾸어 가는지에 초점을 맞춘 드라마다. 이 드라마의 의외성은 암담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주인공의 냉정하리만치 쿨~한 태도에 있다.
▶ 쿨하지 못해 미안해? 너무 쿨해서 미안해
'더빅C'의 주인공 캐시 재미슨(로라 리니)은 올해 42살의 고등학교 역사 교사다. 미니애폴리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캐시가 말기 암을 진단받는 극적인 순간은 모두 건너뛰고, 이미 그 사실을 받아들인 지점에서 출발한다. 파일럿의 첫 장면은 캐시가 손바닥보다 조금 넓은 마당에 수영장을 만들겠다며 시공업체 사장을 불러 공사를 주문하는 장면인데, 너무 좁으니 차라리 노천탕(Hot Tub)을 만들면 어떠냐는 말에도 막무가내로 밀어붙인다.
비슷한 상황은 계속 반복된다. 예전의 캐시라면 하지 않았을 결단의 연속. 예를 들면, 수업시간에 수업을 하는 대신에 노트북으로 거실에 새로 놓을 소파를 검색하고, (캐시가 쇼핑삼매경에 빠진 동안 학생들은 "미국 실제 역사와는 20% 일치하는" '패트리어트: 늪 속의 여우' DVD를 감상한다.) 여름방학 동안 축구 캠프에 가기로 했던 아들을 굳이 못 가게 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무모한 결단이 아니라, 암 진단을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으려고 한 그녀의 결정에 있다.
상황이 그러하다 보니, 캐시가 자신의 병에 대해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담당의사인 닥터 토드(레이드 스콧) 뿐이다. 캐시의 능청맞은 낙천성은 여기서도 진가를 발휘한다. 진료실에서 가운 밖으로 유방의 거의 대부분을 드러내놓고 농담을 주고 받고, 심할 경우에는 가운을 활짝 열어젖히고 "내 가슴이 어떤지 솔직하게 말해달라"며 짓궂게 눈웃음을 친다.
캐시의 병을 아는 사람은 닥터 토드 뿐이라 웃지 못할 해프닝도 연출된다. 캐시가 가족에게 말하지 않은 것을 염려한 의사가 전화를 걸어 음성메시지를 남긴 것을 캐시와 남편(올리버 플랫)이 함께 듣게 되는데, "당신에 대해 생각을 해봤어요…"라는 대목에서 이미 남편은 의사와 캐시가 부적절한 관계라고 단정해버린 뒤다. 사춘기를 겪는 아들 아담은 엄마의 변덕에 별 관심이 없고, 남편은 다짜고짜 부부상담을 받자며 손을 잡아끈다. 친오빠도 캐시의 달라진 모습의 원인을 궁금해 하기보다 "너 옛날모습 나오네~"라며 놀리고 말 뿐이다. 그렇게 캐시의 비밀은 계속해서 암처럼 가슴 안에 머문다.
뚱뚱한 학생 안드레아에게 다이어트를 제안하고(위), 심술궂은 이웃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등, 암 진단 이후 캐시는 과감해진다. ▶ 쇼타임이 내놓은 새로운 컨셉트(Concept)의 암(Cancer) 코미디(Comedy)
드라마의 타이틀 '더빅C'의 'C'가 의미하는 것은 많다. 가장 직접적으로는 암(Cancer)를 뜻할 텐데, 이 드라마의 원래 제목이 'The C Word'였다는 것과 현재의 제목이 '더빅C'라는 것을 감안하면 알 수 있듯이, 드라마 안에서 '암(Cancer)'이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없다. "L워드"가 레즈비언을 의미하고, "F워드"가 F로 시작하는 비속어를 대신하고, "N워드"가 흑인을 비하하는 말을 에둘러 말하는 것처럼 '더빅C'에서 "암"이라는 단어는 금기시된다.
조금 다른 시각에서 이 제목을 바라본다면 '더빅C'의 'C'는 케이블 네트워크 '쇼타임'의 비전을 선언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 동안 '위즈'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타라' '너스 재키' 등 독립적인 여성 캐릭터를 중심에 놓은 TV시리즈를 선보여온 '쇼타임'에서 내놓은 비슷한 컨셉트의 (그러나 다른 이야기의) 오리지널 시리즈라는 점에서 컨셉트(Concept)의 'C'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C'는 코미디의 'C'다. 여러 인터뷰에 따르면, "이제는 '암'을 소재로 한 코미디가 나올 때가 됐다"는 것이 제작자 달린 헌트의 전언이었다.
사실 주제가 주제이다 보니까, 아무리 낙천적이고 쿨한 태도를 가진 주인공이라고 해도 그 아이러니 때문에 이야기가 더 슬퍼지는 건 당연하다. "Adam Gone(아담 집에 없음)"이라고 달력에 축구캠프 기간만큼 길게 그어놓았던 스케줄을 "Adam Home"(아담 집에 있음)으로 고쳐 적으며 빙그레 웃는 캐시를 보면 아들을 가진 엄마이면서 치료를 포기한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 괜시리 마음이 뭉클해지기 때문이다.
분명 제대로 된 이유가 있어야 시청자들이 납득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내 삶을 살겠다"는 캐시의 시도들이 시한부 인생에 기초한다는 사실 때문에 웃기기보다는 슬프다. 자신이 책임질 수 없을 것이 뻔한데도 상대방에게 상처주기 싫어서 끝까지 그 짐을 가지고 가려는 그 시도가 다친 새의 날갯짓 마냥 가냘퍼 보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없을 때를 대비해 준비시키려는 캐시와 호응하지 않는 아들 아담. ▶ '캐릭터'에 둘러싸인 캐시의 미련한 모습
"눈물은 사치"라는 듯, 아주 성실하게 감상주의를 배제하고 새 인생을 살려는 캐시의 몸부림이 안쓰러운 이유는 또 있다. 정작 캐시가 말할 수 있는 상대들이 '사람'이기보다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남편, 아들, 이웃, 학생 할 것 없이 모두 너무나 두드러지는 캐릭터인 탓에 과연 캐시가 입을 열어 비밀을 말하면 어떻게 반응할지 보는 입장에서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더빅C'의 위키피디아 페이지에 올라온 정보에 따르면, 앞으로 '섹스 & 시티'에서 미란다로 출연했던 신시아 닉슨이 캐시의 친구로 출연할 예정이고, '더 와이어'의 이드리스 엘바가 캐시와 연정을 나누는 상대로 마지막 4개 에피소드에 출연할 예정이다. 게다가 리암 니슨 역시 깜짝 출연을 예고해 놓은 터라, 매우 좋은 캐릭터들의 옷을 입은 훌륭한 배우들 틈에서 캐시의 비밀이 공개됐을 때 과연 그 파장이 기대 만큼일지 걱정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더빅C'를 이끌어 가는 힘은 온전히 여배우 로라 리니로부터 나온다. '러브 액츄얼리'의 '짝사랑녀' 사라로 가장 많이 알려졌을 이 여배우는, 'LA타임즈'의 분석에 따르면 영화계에서 가장 저평가된 배우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3번이나 지명됐지만('유 캔 카운트 온 미' '킨제이 보고서' '새비지스') 수상으로 이어지지 못한 반면, 그녀가 출연한 TV작품 '존 아담스' '프레이저' '와일드 아이리스'를 통해서 3번이나 에미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고래같이 기세등등한 캐릭터들 사이에서 새우등 터지는 일이 없었으면 하고 바랄 뿐인데, 이런 기우는 '러브 액츄얼리'에서 보여준 로라 리니의 캐릭터에서 기인하는지도 모른다. 캐시를 보면 '러브 액츄얼리'에서 좋아하는 남자에게 고백하려다 돌아서는 미련한 모습이 자꾸 겹쳐진다. 울듯 말듯 입술을 떨다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는 모습. 그 미련한 이미지가 인장을 새겼는지, '더빅C'에서의 쿨한 냉정도 어느 순간 미련한 온정으로 변해버릴 것 같아 초연한 냉정함에도 마음이 떨려온다.
거침없이 행동하는 캐시의 뒤를 따르는 남편. 부인의 변한 모습에 부부상담을 제안한다. ▶ 하루를 살아도 나를 위해서
"어렸을 때부터 머리카락을 자르면 늘 눈물이 났어요. 머리카락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치료 같은 건 받지 않을래요." 진료실에 누워 아무렇지 않게 캐시는 읊조린다. 눈물이 나는데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눈에 뭐가 들어가서 눈물이 나는 거라는 얼토당토않은 변명과 다를 게 없지만, 그래서 그걸 보는 시청자는 마음 한구석이 아리다.
"당신 그거 알아? 우리가 파리로 신혼여행 갔을 때 토플리스 비치에서 나는 부끄러워서 비키니를 입고 있었잖아. 사진을 다시 보니까 나 좀 귀여웠더라고." 미루어 짐작하건대 암 진단 이전의 캐시는 경직된 삶, 희생하는 삶의 전형이었다. 그런 그녀가 암 진단 뒤 하루를 살아도 나를 위해서 살려고 한다. 거침없이 말하고, 거침없이 행동한다. 나는 그 "하루를 살아도"에 깊이 이입했다. 얼마 전 엄마와 나눈 대화 중에, 엄마는 "부모의 1년 중에 364일이 '자식의 날'"이라고 말을 했다. 분명 농담조로 말했는데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밀려와 하마터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 했다.
부모가 죽을 날을 받아 놓고야 회개하는 못난 자식이 되고 싶지 않아 부탁합니다. 이 세상의 엄마들아, 하루를 살아도 당신을 위해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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