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 2. 그렇다면 문근영 씨의 무대 데뷔작으로 화제가 된 연극 '클로져'의 제목은 무슨 의미일까요? 답 1. 더 가까운, 친밀한 답 2. 폐색기 답 3. 최종회 답 4. 관계의 종료를 알리는 행위
영문법을 열심히 공부하신 분들도 가끔씩 혼동하시는데 퀴즈 1의 정답은 둘 다 맞습니다. close가 문을 닫다, 끝내다는 동사로 쓰일 때는 /클러우즈/로 발음되고 가깝다는 형용사로 쓰일 때는 /클러우스/로 발음됩니다. 따라서 closer가 동사 close의 명사형일 때는 /클러우저/로 발음되지만 형용사 close의 비교급일 때는 /클러우서/로 발음됩니다. 예전에 Close-Up이란 치약을 '클로즈 업'이란 한국어로 표기하는 바람에 이런 혼동이 가중됐죠. 가까이란 뜻의 close-up은 /클러우스 업/으로 발음하는 것이 맞습니다.
자 그럼 Closer라는 연극의 번역극인 '클로져'는 무슨 뜻일까요? 의외로 많은 분들은 이를 형용사 closer의 비교격으로 받아들여 "가까워질수록 멀어질 수밖에 없는 사랑의 본성"으로 풀어냅니다. 하지만 한글제목의 발음에 맞춘다면 동사 close의 명사형으로 풀어내야합니다. 퀴즈 2의 2~4번 중 하나라는 뜻이지요. 연극 속 삼각관계에 빠지는 4명의 남녀가 결국 뿔뿔이 헤어진다는 점에서 정답은 4번 '관계의 종료를 알리는 행위' 내지 '관계를 끝장내는 사람'으로 풀어낼 수 있습니다.
그럼 진짜 정답은 뭘까요? 모두 다 맞습니다. 이 작품의 원작자인 영국극작가 패트릭 마버가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부러 Closer라는 제목을 택했다고 하더군요. 이를 존중해서인지 2004년 마이크 니콜스 감독이 이 작품을 영화화할 때 예고편에서도 제목이 어떤 식으로도 발음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국내 공연에서도 '클로서'나 '클로서'는 물론 '클로져'라는 정체불명의 표기보다는 그냥 알파벳 'Closer'로만 표기하는 것이 좋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호함이야말로 이 연극의 미덕이기 때문입니다.
1997년 초연된 'Closer'는 서양의 지적 예술적 전통에서 매우 이단적인 작품입니다. 이성적인 로고스를 중시하는 서양에서 진리 내지 진실은 반드시 세상에 몸을 드러내야할 그 무엇입니다. 하지만 이 연극은 진실에 대한 집착이 현대인의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되묻고 있습니다. 오히려 진실은 무지의 베일 뒤에 감춰져있을 때 아름답다는 점을 역설합니다.
연극의 주인공인 댄(엄기준/이재훈)은 영국의 부고 전문 신문기자입니다. 신문기자는 사실을 다루고 진실을 추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댄은 오직 진실, 진실만을 부르짖는 현대인의 표상입니다. 댄은 미국에서 건너온 당찬 스트리퍼 앨리스(문근영/신다은)와 성숙한 사진작가 애나(진경/박수민) 사이에서 사랑의 곡예를 펼칩니다. 앨리스와 애나는 모두 첫눈에 그에게 반합니다. 적극적인 앨리스는 그 사랑에 모든 것을 걸고, 신중한 애나는 그 감정에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몸을 사립니다. 댄은 손쉽게 사랑을 나눈 앨리스 보다 자신의 구애에 애써 냉담한 애나에게 더 빠져듭니다.
두 여자의 사랑을 모두 차지한 댄을 파멸로 몰아넣는 것은 바로 진실에 대한 강박증입니다. 댄은 먼저 사랑에 빠졌던 앨리스에게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 없다면서 애나를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둘의 사이를 눈치 챘지만 애써 외면하던 앨리스는 그로 인해 큰 상처를 받고 결국 댄을 떠납니다. 댄과 앨리스의 사랑의 '종지부를 찍은 사람(Closer)'은 사랑에 충실했던 앨리스가 아니라 진실에 충실했던 댄입니다.
한편 애나는 댄과의 관계에 부담을 느껴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피부과의사 래리(최광일/배성우)에게 도피합니다. 그렇지만 댄의 줄기찬 구애에 결국 불륜에 빠지고 래리에게 이혼을 요구하게 됩니다. '오쟁이 진 남편'이 된 래리는 댄에 대한 복수로서 이혼의 조건으로 애나와 마지막 정사를 요구합니다. 애나는 자신의 사랑을 위해 이를 비밀에 붙이는 조건으로 수락하지만 래리가 쳐놓은 덫은 항상 진실에 굶주린 댄에게 결국 치명적 상처를 안깁니다.
댄은 그토록 기다리던 이혼장을 들고 온 애나의 어두운 낯빛을 보고 감춰진 진실을 밝혀야한다는 '직업병'이 도집니다. 그는 애나에게 이혼의 대가로 무엇을 줬는지를 계속 추궁한 끝에 영혼의 짝이라 믿었던 애나와도 결별하게 됩니다. 이번에도 두 사람의 사랑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Closer)'은 진실에 대한 갈증과 허기에 시달리는 댄입니다.
애나와 헤어진 댄은 다시 앨리스를 찾아갑니다. 우연히 스트립바에서 앨리스를 만난 래리가 알려준 연락처를 통해. 댄과 앨리스는 다시 찾아온 사랑의 벅찬 기쁨을 나누지만 그것도 잠시 결국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고 맙니다. 이번에도 Closer는 댄입니다. 앨리스가 자신의 연적인 래리와의 동침여부에 대한 강박증으로 앨리스의 사랑마저 영원히 잃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오르페우스 신화의 현대적 변주입니다. 리라의 귀재인 오르페우스는 음악의 힘으로 저승을 다스리는 하데스를 감동시켜 저승으로 끌려간 아내 에우리디케를 이승으로 데리고 돌아올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호기심을 못 이기고 "저승을 빠져나갈 때까지 뒤돌아보지 말라"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바람에 다시 에우리디케를 잃고 맙니다.
과도한 호기심 내지 진실에 대한 집착을 경계한 설화는 비단 오르페우스 신화뿐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의 이브 설화, 판도라의 상자 설화, 프로메테우스 설화를 거쳐 소설 '프랑켄슈타인'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이성의 빛으로 무지의 어둠을 쫓아내야한다는 18세기 계몽주의의 등장 이후 이런 신화적 설화는 힘을 잃고 맙니다.
진리추구를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에게조차 구원의 빛을 얻는 괴테의 '파우스트' 이후 인간의 호기심에는 무제한의 자유가 부여됩니다. 과학의 성공과 더불어 이런 현상은 더욱 강화됩니다. 오늘날에는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진실추구는 인간의 신성한 의무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진실, 나는 거기에 중독 됐어. 만일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짐승에 불과해!"라는 영화 'Closer' 속 댄의 대사가 이를 웅변합니다.
문제는 인간의 호기심을 무한 충족시켜주는 과학이 결코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징후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통해 발현됩니다. 정신분석학은 본디 세계의 객관적 연구를 위해 개발한 과학을 인간 자신에게 적용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를 통해 발견된 무의식이란 미지의 대륙은 참과 거짓의 이분법으로 포착될 수 없음이 드러납니다.
두 번째 징후는 양자역학 혁명을 통해 발현됩니다. 빛은 입자이기도 하고 파장이기도 하다는 양자역학의 세계 역시 on/off의 이진법적 과학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세 번째 징후는 구조주의 인류학을 통한 신화의 재발견을 통해 발현됩니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 비과학적이라고 치부됐던 신화의 세계에 인류 보편의 놀라운 지혜가 담겨있다는 점과 그 신화적 윤리에 충실한 삶을 사는 원시인들이 오히려 행복한 삶을 영위한다는 점이 발견됩니다.
연극에서 댄이 과학적 진실에 중독 된 현대인을 대변한다면 앨리스는 신화적 사랑을 대변합니다. 댄은 앨리스에게 집요하게 진실을 요구하며 급기야 "도대체 넌 누구니"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앨리스는 "나?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답합니다. 연극에서 댄은 그 의미를 끝까지 파악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영화 속 댄은 마지막 장면에서 그 의미를 깨닫습니다. 앨리스는 댄을 만난 그 순간에 새롭게 태어난 여인입니다. 따라서 앨리스에겐 과거의 진실따위는 처음부터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오직 현재의 진심뿐이었으니까요.
미국의 문학평론가 로저 샤툭은 '금지된 지식'이란 책에서 진실에 직접 접근하는 것의 위험성을 경고했던 수많은 신화와 문학의 경고가 계몽주의 이후 어떻게 왜곡됐는지를 들려줍니다. 신의 영역을 넘보며 절대적 진리를 추구한 이들은 한결같이 눈이 멀거나 마비당하거나 지옥의 고통을 맛보게 됩니다.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시대를 거치며 이런 고통을 찬미하는 경향이 생성됐지만 수천 년에 걸쳐 축적된 인간의 지혜는 이런 도착증을 끊임없이 경고해왔습니다.
로저 샤툭은 지식이건 사랑이건 폭로(暴露)라는 형태를 취하면 그것이 곧 포르노그래피와 다를 바 없다고 갈파합니다. 'Closer'에는 18금(襟)의 표현이 넘쳐나지만 그것을 직접적으로 시각화하진 않습니다. 이는 스트리퍼인 앨리스가 고객에게 전신을 노출하진 않는 것과 닮았습니다. 설사 전신을 노출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보여주는 것은 껍데기일 뿐 그 내면은 아닙니다.
앨리스는 사랑의 조건으로 진실을 요구하는 댄을 향해 "보여 줘. 사랑이 어디 있는데? 난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고, 느껴지지도 않는데"라고 항변합니다. 진실만 쫓다가 정작 진심을 놓치고 마는 우리 현대인을 뒤돌아보게 만드는 신화적 지혜가 반짝거리는 대사입니다. 이야말로 궁극적 진리는 무지의 베일 너머에서 형용할 수 없는 신비로 남아야한다는 샤툭의 통찰과 공명하는 부분입니다.
연극도 좋고 영화도 좋습니다. 'Closer'라는 제목의 이런 묘미를 다시 한번 느껴보시기를.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 오·감·만·족 O₂는 동아일보가 만드는 대중문화 전문 웹진입니다. 동아닷컴에서 만나는 오·감·만·족 O₂!(news.donga.com/O2)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