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연기관은 '캐릭터를 통해 내가 가진 것을 극대화하는 것' ● 밤마다 '홍벽서' 날리는 문재신, 현실적인 청춘의 모습 같아 ● 문재신은 '식스팩 짐승남' 아닌 날 것의 산짐승 같은 짐승남! ● "'성스' 좌절로 끝나 10대 20대들이 무기력감 느끼면 좋겠다."
미간을 찡그리며 먼 곳을 바라본다. 큰 숨을 내쉰 뒤 입을 연다.
경기 화성에 위치한 KBS '성균관 스캔들'(이하 '성스') 세트장에서 만난 배우 유아인(24)은 스스로 말이 많다고 했다. 한 시간 동안 그가 쏟아낸 말은 A4용지 9장 분량이었다. 그러나 쉽게 내뱉은 말은 없었다. 질문이 끝나면 반사적으로 준비된 답을 내놓는 여느 연예인들과 달리 그는 생각을 정리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보여주고 싶은 것이 많아 배우가 됐다"는 그는 생각이 많고 말이 많은 배우였다.
▶"끊임없이 문제 제기하는 홍벽서, 그게 청춘이죠."
-좀 수척해진 것 같아요. "5kg 정도 빠졌어요. 지금도 계속 빠지고 있는 것 같아요."
-지방 야외촬영이 대부분이라 추운 날씨에 고생한다고 들었어요. "문경은 정말 추운데 죽을 정도는 아니에요. 핫팩 붙이면 버틸 수 있어요."
-문재신은 한 마디로 '짐승남'으로 표현돼요. 마음에 드나요? "남자보단 소년에 가까운 것 같아요. 완전한 모양을 갖춘 남자가 아니라 급변하고 있는 그 또래의 소년이죠."
-'짐승남' 재신으로 캐스팅되고 태닝하고 액션스쿨에 다녔다고 알려졌어요. "(웃음) 태닝하고 액션스쿨 다닌 게 부각되는데 사실 별 것 아니에요. 그냥 새까매질 정도로 태닝했고 이상한 정도는 아닐 정도로만 몸 만들었죠. 아무래도 시청자들께는 외적인 변화에서 오는 게 강하니까 많이들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말끝을 흐리더니 잠시 침묵.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왜 그냥 별 거 아니라고 얘기하고 싶죠?"라는 시시한 답이 돌아왔다. 사실 이 질문 하나로도 태닝하느라 고생한 이야기 액션스쿨에서 다친 이야기 등을 풀어내면 10분은 족히 이야기할 수 있을 터였다. 그에게선 그런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빼곡히 준비한 질문지가 민망해졌다. 그래서 뻔한 인터뷰가 아닌 대화를 나눠보기로 했다.
-외적보다는 내적인 노력을 했다는 말인가요? "대중들은 문재신을 통해 제가 변신 변화했다고 하는데 정작 나는 '아무 것도 안 변했어요'라고 하면 웃기잖아요? 근데 정말 크게 변한 건 없거든요. 내가 가진 색깔 중에 하나를 꺼낸 것 뿐이예요. 그래서 다른 색이 나왔고요. 앞으로도 또 다른 모습을 얼마든지 꺼내 보일 수 있고요. '이렇게 잘 변신했습니다' 보단 '이렇게 많은 걸 가지고 있습니다'로 어필하고 싶어요. 어떤 순간이든지 겉모습만 준비된다면 꺼내 보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동안 다양한 역할을 맡았는데 모두 아인 씨 안에 있는 모습이었나요? "네. 제 연기관은 내가 가진 부분을 캐릭터를 통해 극대화시키는 것이에요. 기본적으로 저는 나한테 없는 것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성스'에서는 문재신이라는 껍데기를 통해 엄홍식을 보여주고 있죠."
유아인은 2003년 청소년드라마 '반올림'에서 옥림이(고아라 분) 남자친구 유아인 역으로 데뷔해 영화 '좋지 아니한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드라마 '최강 칠우' '결혼 못하는 남자' 등에 출연했다.
-그렇다면 재신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아인 씨 모습은 무엇인가요? "물론 남자답고 거친 모습도 있고요. 결핍이나 슬픔. 요즘 크게 와 닿는 것은 홍벽서로서의 모습인 것 같아요. 재신은 밤마다 검은 복면을 쓰고 세도가들 집 대문에 '홍벽서'를 화살에 꽂아 날려요. 이정무(김갑수 분)의 대사처럼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치기를 가진 청춘이죠. 그 대사를 보면서 재신은 정말 나와 닮은 아이구나. 내가 했어야 하는 역할이구나 느껴요. 나는 청춘 청춘 지껄이며 사는 사람인데, 청춘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역할을 맡아 감사해요."
홍벽서는 시국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붉은 문서. 일부에서는 홍벽서에 문제 제기만 있고 대응책은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유아인의 생각은 달랐다.
"그게 청춘이잖아요. 대응책까지 제기할 수 있으면 재신이가 영의정 좌의정 하죠. 대부분 사람들은 문제의식도 없이 살아요. 문제의식을 제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는 일인 것 같아요. 청춘의 딜레마이기도 하지만 저 또한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해야 하지 않느냐고 계속 생각해요. 그러다보면 해답에 접근하겠죠."
14회에서 재신은 홍벽서를 뿌리는 이유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으니까" "그래야 사니까"라고 말한다. 트위터에 "21세기 엄홍식은 18세기 홍벽서"라고 적은 그는 재신의 마음이 너무도 와닿는다고 했다.
"논리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사람들의 반응을 끌어내서 문제를 해결하겠다가 아니라 그냥 문제의식에 사로잡혀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살 수 없는 거예요."
-그게 아인 씨가 생각하는 청춘인가요? "제 생각이라기 보단 현실적인 청춘의 모습인 것 같아요. 항상 문제에 사로잡혀 있지만 어디에도 해답은 없고, 그래서 답답하고…. 보통의 청춘들이 그렇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오히려 해답에 가까워져 있는 사람이에요. (해답을) 많이 찾으려고 노력해왔고 영악한 편이고, 혼란스러운 반면 논리적이기도 하고요."
-그 단계를 지난 건가요? "어느 정도 체화돼서 실행에 옮기며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이전의 저는 어질러진 채 정리되지 않은 방이었다면 이제는 제자리를 잡아주고 책꽂이에 꽂아준 것 같아요. 차근차근 실행에 옮기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의식적으로 혼란스러워하고 흩트려보기도 해요. 정답이 나온 채로 살아가면 재미없고 뒤쳐질 수 있으니까요."
그는 "혼란스러워서 힘들지만 그래도 혼란스러웠으면 좋겠다"며 또박또박 한 단어씩 힘주어 덧붙였다.
▶"'성스' 시즌2 제작하더라도 출연하지 않겠다"
-재신 역을 맡으면서 노출이 많아졌어요. "하하하. 그렇죠? 시안을 받아보면 이제 아예 웃통이 없어요. 이건 아니에요. 아주 상업적인 짐승남의 모습이죠. 식스팩으로 어필하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나는 '짐승남' 문재신이니까 벗어야 해' 이런 것이 싫어요. 이게 먹혔으니 계속 해야지 하는 안일함은 재미없어요. 저는 벌써 식상한걸요. 소속사에 이제 옷은 입자고 말하고 있어요. 하하하."
-'걸오앓이'한다는 팬들이 엄청나요. 인기를 체감하나요? "체감하려고 하는 편이에요. 반응들도 많이 보고 있고, 호응이 있다면 들뜨고 싶어요. 초반에는 누가 연기를 지적하면 신경 쓰였거든요. 지금은 오히려 좋은 것만 보고 박수쳐주시는 분들께 더 귀 기울이려고 해요. 원래 저는 '인기가 얼마나 가겠어' 하는 스타일인데 생각해보니 굳이 그럴 것 있나 싶었어요. 박수쳐주면 으쓱해보기도 하고 즐겨보기도 하고 끝나면 끝났구나 편하게 생각하려고 해요."
'반올림'에 출연하며 팬카페 회원수만 15만명이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던 유아인은 이후 한 인터뷰에서 '인기는 사라지고 제약만 남았다'고 한 적이 있다. 지금의 인기를 마냥 즐길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좋을 때 우와 좋구나, 끝나면 끝났구나. 결국 나는 여기, 같은 자리에 있잖아요. 어느 날 나를 기쁘게 하고 설레게 하고, 또 어느 날은 수그러들고 떠나가더라도 안녕이라고 편하게 인사할 수 있는… 인기나 일뿐만 아니라 애인도 그래요. 제 성향인 것 같아요. 물론 좋은 것들 긍정적인 것들은 제가 노력해서 붙들고 있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되지 않는 것이라면 편안하려고 노력해요."
-재신이에게 애착이 많은 것 같아요. 드라마가 끝나면 후유증에 시달리지 않을까요. "맞아요. 그런 것 있어요. (침묵) 재신이를 통해서 내 것을 쏟아내고 풀어내고 있어서 후련할 것 같아요. 팬분들도 재신을 통해 유아인을 보시면서 좀 더 편안하게 저를 봐주시는 것 같아요. 드라마가 끝나도 재신이라는 색깔이 극대화되어 있는 상태로 지낼 거예요. 다른 캐릭터를 만나서 다른 면을 끌어 올릴 때까지는 그렇게 살아가겠죠."
-드라마가 종반부를 향해 가면서 팬들 사이에서는 시즌2를 제작해달라는 의견이 있어요. 원작 소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에는 후속편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이 있는 만큼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닐 것 같은데요. 만약 시즌2가 제작된다면 아인 씨는 출연할 생각인가요?
답변에 앞서 신음소리가 먼저 돌아왔다. 한참을 고민한 뒤에야 답을 했다.
"2년 정도 후에 들어간다면 그때 정말 제대로 고민해 볼게요." "지금 결정해야 한다면요?"(기자) "(침묵) 안 하고 싶어요."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유를 묻자 또 고민이 시작됐다.
"지금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성스', 재신의 결승점은 정해져 있으니까요. 그 다음은 그 다음에 생각할 문제이고요." "재신으로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끝날 것 같나요?"(기자) "그렇진 않겠죠."(유아인) "그렇다면 아쉽지 않겠어요?"(기자)
"굳이 재신이만의 입을 빌려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른 캐릭터, 글, 또 다른 무언가를 통해서도 말 할 것"이라던 그가 멍해졌다. 그리고 또 다시 침묵이 흐른 뒤 혼잣말처럼 작게 "하지만 아쉽겠다"고 했다.
"하는 동안에는 얼마나 감사한지 잘 모르잖아요. 내가 이만큼 큰 발언의 기회를 가질 수 있을까. 문재신이라는 목소리를 통해서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데, 이런 목소리를 다시 가질 기회가 있을까 생각은 해요."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