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이 터지자 이종렬 씨는 태어난 지 100일 된 금쪽같은 아들을 뒤로한 채 국군에 입대했다. 당시 서른이던 그는 올해 아흔이 됐고 아들 민관 씨는 환갑을 맞았다. 입대하던 날 학교에 다녀오던 열다섯 살 동생에게 “나 갔다 오마”라고 한 것이 가족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지난달 30일 오후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에 나타난 아버지 이 씨는 백발에 부축을 받아야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쇠약했다. 한쪽 눈의 시력은 잃었고 다리는 전쟁 때 총에 맞아 불편한 상태였다.
60년 만에 아버지를 만난 민관 씨는 애써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돌아가신 줄 알았어요. 그래서 제사까지 모셔왔는데…”라며 오열했다. 자신을 빼닮은 아들을 아버지는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 뿐 말문을 제대로 열지 못했다.
북한에서 뇌출혈로 죽을 고비를 넘겼던 이 씨는 1989년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고 휠체어를 탄 아들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10분이 지나서야 힘들게 입을 열었다.
“민관아, 민관아. (한참이 지난 뒤) 너를, 네 어머니, 우리 가족을 60년간 단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다.”
‘국군 장병’ 이종렬은 이렇게 60년 만에 다시 가족의 품에 안겼다. 그는 전쟁 중 사망한 것으로 처리됐고 가족들은 그의 기일을 꼬박꼬박 챙겨 왔다. 하지만 이 씨는 살아남았고 북측에서 결혼해 6남매를 낳고 살아왔다. 이 씨가 북에서 낳은 아들 명국 씨(55)는 “아버지가 낙동강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고 전했다. 북한 정부가 1993년 그에게 ‘전국노병대표자’ 증명서를 줬다는 것 정도가 파악된 사실의 전부다.
역시 국군 출신으로 북한에서 살다 이산가족 상봉장에 나온 이원직 씨(77)는 남측의 누나 이운조 씨(83)와 이원술 씨(72) 등 동생 3명에게서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 산소에도 못 가보고…”라며 굵은 눈물을 흘렸다. 경북 구미가 고향인 이 씨는 6·25전쟁 때 청도로 피란을 갔다가 그곳에서 국군에 징집된 후 소식이 끊겨 역시 전사자로 처리됐다.
스무 살 때 군대에 갔다가 전사자로 처리된 윤태영 씨(79)는 상봉장에 나온 남측 동생 4명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며 얼굴을 확인하다 막내 동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애통해했다. 남측의 동생들은 부모의 영정을 윤 씨에게 보여줬다. 동생들은 형의 전사 통보를 받기는 했지만 전사 시기를 정확히 몰라 9월 9일을 기일로 정해 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
면사무소 사환으로 일하던 중 전쟁이 터지자 국군에 자원입대했다 전사자로 처리된 방영원 씨(81)도 형수 이이순 씨(88)를 만나 28년 전 세상을 떠난 형의 소식을 들었다. 방 씨는 또 누나 방순필 씨(94)가 아직 살아있지만 한 달 전부터 갑자기 건강이 나빠져 이번에 오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안타까워했다.
이들 국군 출신 4명은 모두 국방부 병적기록부에는 올라 있지만 우리 당국이 북한에 생존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국군포로 500여 명의 명단에는 들어 있지 않다. 정부는 북측이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북측 상봉자 100명의 신원을 통보한 지난달 20일 이들이 국군 출신이며 전사자로 처리된 사실을 확인했다. 정부 당국자는 “이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북측에서 생활하게 됐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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