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장르마다 계절 특수가 있다. 여름에는 공포영화, 가을에는 잔잔한 멜로드라마, 크리스마스부터 화이트데이까지 이어지는 겨울에는 로맨틱코미디 등 매년 비슷한 시기에 특정한 장르가 극장에 걸리는 건 그래서다.
TV시리즈에도 계절 특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나는 코미디가 당긴다. 우선 코미디는 회당 상영시간이 짧다. TV시리즈 드라마가 중간 광고까지 포함해 1시간 가량 방영된다면, 코미디는 30분이면 한편 시청이 가능하다. 두 번째, 에피소드별 독립성이 드라마 보다 강해서 플롯간 연결이 느슨하다. TV시리즈라는 특성상 여러 편의 에피소드를 하나로 묶어주는 기둥 줄거리야 있겠지만, 사실 몰라도 그만이다. 중간에 한 두 편 빼먹는다고 해서 그 에피소드 한편을 즐기는데 전혀 문제 될 게 없다는 이야기다. 세번째, 사실 가장 중요한 이유인데, 머리 쓸 필요가 없다는 것. 사건의 인과관계, 인물간 관계 같은 건 그려볼 필요 없이 그냥 보고 즐기면 그만이다.
▶ 아슬아슬한 코미디 '아웃소스드'를 소개합니다!
누군가 요즘 볼만한 '미드'가 있냐고 물어오면, 시청률과 여론을 참고해 추천하고, 웬만하면 코미디는 피하는 편이다. 다른 장르보다도 코미디가 유독 추천하기 어려운 이유는, 웃음의 소재를 어디서 가져오느냐에 따라서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나뉘기 때문이다. 또 같은 소재도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천차만별이라 싸구려 웃음부터 영리하고 고급스러운 유머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이번에 소개하려는 NBC의 새 코미디 '아웃소스드'(Outsourced) 역시 소재 탓에 처음부터 대놓고 재미있다고 인정하지는 못했던, 하지만 이유 없이 좋았던, 살짝 아슬아슬한 코미디다.
NBC \'아웃소스드\' 포스터.
그렇다고 '아웃소스드'가 선정적인 소재를 다루는 코미디는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흔히 '아웃소싱'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주인공은 캔자스 출신의 순진하기 짝이 없는 남자 토드(벤 라파포트)다. 토드는 '중미엽기쇼핑몰'이라는 가짜 토사물, 방귀 방석, 치즈 모양 응원모자 등 딱히 필요하지는 않지만 미국인들이 열광해 마지않는 장난용 소품을 파는 통신판매회사의 콜센터 매니저다. 그런데 그가 외부교육을 받으러 며칠 자리를 비운 사이 사장이 통화요금도 저렴하고 임금수준도 낮은 인도의 뭄바이로 회사의 콜센터를 옮겨버린다. 이런 청천벽력이 또 있을까, 하루아침에 근무지를 생판 모르는 외국으로 옮겨야 하는 토드는 소심하게 항의도 해봤지만 "가기 싫으면 회사를 그만두라"는 협박과 "학자금 대출 4만 달러"라는 현실에 굴복해 뭄바이행 비행기에 오르게 된다.
▶ 성공하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는 토드, 금의환향 할 수 있을까?
차도와 보도의 구분이 따로 없고, 소와 트랙터가 한 화면에 잡히는 인도에서 토드를 맞이하는 건 부매니저 라지브다. "매니저님의 성공이 저의 성공입니다. 하지만 매니저님이 실패해서 미국으로 돌아가셔도 콜센터는 제가 관리하죠." 라지브의 유일한 목표는 토드를 미국으로 다시 돌려보내고 콜센터 매니저로 승진하는 것이라, 토드가 실수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라지브를 비롯해 콜센터 직원들은 전부 인도인이다. 한번 입을 열면 다물지 않는 수다쟁이 굽타, 카스트의 최하층이라 목소리도 너무 작고 존재감도 없는 마두리, 미국문화를 동경하고 미국 여자와 데이트를 꿈꾸는 맨미트(이름이 '인육'이라 코미디의 소재가 된다), 아름답고 이성적인 아샤 등이 있고 토드와는 말을 섞지 않으려는 듯 눈만 마주쳐도 굳은 얼굴로 자리를 피하는 남자직원도 있다.
중미엽기쇼핑몰 콜센터의 직원들. 왼쪽부터 마두리, 라지브, 아샤, 굽타, 맨미트, 그리고 토드다. 백인 관리자와 현지인 부하직원이라는 대치적 상황은, 당장에 문화 차이로 그 존재를 드러낸다. 영어도 서툴지만 무엇보다 왜 이런 물건을 팔아야 하는지 (그리고 미국사람들은 왜 이런 물건을 사는지) 직원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무실을 구성하는 직원의 절대다수는 인도인이지만, '중미엽기쇼핑몰'에서 판매하는 소품들은 지극히 미국적이어서, 토드와 함께 이야기 안에서 미국을 상징한다. 문화 차이는 다른 곳에서도 벌어진다. 어깨를 잡고 격려하는 자연스럽고 친근한 스킨십이 성희롱으로 받아들여지는가 하면, 크리스마스에 겨우살이 가지 밑에서 키스하는 풍습을 두고, "신의 아들이 태어난 날을 그렇게 축하하느냐?"고 갸우뚱거린다.
하지만 인도라는 지역적 배경을 지우고 보면, '아웃소스드'의 사무실은 여느 사무실과 똑같다. 다양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한자리에서 함께 일하고 하루의 대부분을 같이 지내다 보니 친해지거나 혹은 싫어하게 되거나 하는 자연스러운 사람 사는 이야기가 들여다보인다. NBC의 시트콤 '오피스'의 제작자인 켄 콰피스가 '아웃소스드'의 크레딧에 이름을 올린 것이 아마도 '인도 vs 미국'이라는 구도를 떠나서 '사람들이 모여 일을 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려낼 수 있는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 새롭지 않은 소재, 새로운 시선으로 신선한 웃음 제조
너무 각박한 평가가 아닌가도 싶지만 '아웃소스드'가 '새로울 것 없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시작한지 이제 한달이 조금 넘은 TV시리즈에 '새로울 것 없다'니, 너무한 평가가 아닌가 싶지만, 사실 '아웃소스드'는 2006년 개봉한 동명의 독립영화에서 모티브를 가져왔기에 완전히 새로운 아이디어라고 할 수는 없다. 또 2009년 BBC에서 제작한 '뭄바이 콜센터'도 비슷한 설정에서 출발하므로, '아웃소스드'는 참고할 선배가 많았던 셈이다. 영화가 뭄바이의 콜센터 교육을 위해 시애틀에서 직원을 파견하면서 벌어지는 로맨틱한 이야기였다면, TV시리즈는 2개국의 문화차이에서 벌어지는 삐걱거림을 더 자주 등장시킨다. 토드가 아름다운 인도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건 TV시리즈에서도 유지되는 플롯이다. 여기에서도 중매결혼이 일반적인 인도와 연애결혼은 물론 혼전 성관계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미국의 결혼문화가 도마 위에 올라간다.
언제나 긍정적으로 업무에 임하는 토드. '아웃소스드'로 처음 TV에 출연한 배우 벤 라파포트가 연기한다. 처음에 '아웃소스드'를 두고 아슬아슬하다고 설명했던 이유도, 바로 민감하게 여겨질 수 있는 소재들 때문이다. 아무래도 미국이 강대국이다보니 배타적인 시선으로 외국의 문화를 곡해하거나 비하하는 등 건강하지 않은 웃음거리로 만들 가능성이 있었고, 비슷한 이유로 '아웃소스드'는 방영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런 연장선 위에 놓인 우려와 비난을 미리 감내해야 했다. 파일럿을 봤을 때 들었던 생각도 비슷했다. 너무 조심스럽게 다가서다 보면 재미가 덜할 것 같고, 너무 노골적으로 나가면 천박하기 짝이 없는 촌극으로 끝날 것 같았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본 지금, '아웃소스드'는 정확한 트랙 위에서 안전하게 뛰고 있다. 비결은 미국의 시선으로 인도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인도의 시선으로 미국을 바라본 것. 대부분의 에피소드에서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미국이지 인도가 아니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던가?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해석할 건 없겠지만, '아웃소스드'는 그런 점에서 제법 신선한 재미를 선사한다. '중미엽기쇼핑물'에서 파는 소품들만으로 명절마다 TV에서 방영해주는 '퍼니스트 홈 비디오' 같은 효과도 내고 있으니, 허허실실 바보 같은 웃음을 즐겼던 시청자들이라면 '아웃소스드'를 기대해도 좋다.
안현진 잡식성 미드마니아 joey042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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