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가짐의 미학'을 적절하게 살린 '한국판 SNL'
● 정형돈, 길, 그리고 호란의 숨겨진 매력…지적이면서도 웃음충만!
미국이나 일본의 심야 프로그램 중에는 (심지어 공중파라고 해도) 깜짝 놀랄 만큼 자극적인 프로가 적지 않다. 여기서 자극적이란 단순히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걸 말하는 게 아니다. '파격적으로 망가진다'는 의미에서다.
지난해 이맘때쯤 미국 NBC 방송국의 심야 토크프로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aturday Night Live, 이하 SNL)'에서 팝의 고전인 '마돈나'와 신세대 스타 '레이디 가가'가 등장해 마치 레슬링을 연상케 하는 난투극(?)을 벌인 적이 있었다.
두 명의 팝스타가 서로 "내 노래와 춤이 더 낫다"고 몸싸움을 벌였으며 진행자 케넌 톰슨이 말려 상황이 겨우 진정된 것.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 언론은 이 가십거리를 '팝스타의 난투극'으로 보도했다.
직접 방송을 본 사람이라면 이 몸싸움이 치밀한 각본에 의한 망가짐이라는 사실을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 마치 한국 버라이어티쇼에서 소녀시대 '유리'와 카라의 '구하라'가 씨름을 했는데, 해외 언론이 이를 "격투기를 벌였다"고 보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SNL은 할리우드 배우와 가수들이 출연해 '망가짐의 미학'을 담아내는 코미디 쇼로 미국에서 인기가 높다. 대부분의 미국 토크쇼들은 MC나 스타출연자 모두 분위기에 맞춰 철저하게 '몸 개그'와 '정치 풍자개그'를 피하지 않는 근성을 보이기도 한다.
MBC 신설 개그쇼 난생처음
■ 드디어 한국에도 새로운 형식의 코미디가…MBC '난생처음'
"새로운 형식의 코미디 콩트…한국에는 없는 장르의 개그쇼"('난생처음' 제작진)
MBC가 수요일 심야 음악프로그램인 '라라라'를 폐지하고 '개그쇼 난생처음'를 들고 나왔을 때 기대보다는 우려가 많았다. 과연 인디음악계의 불만을 잠재울 정도의 수준 높은 대체재일까, MBC의 '하땅사' '꿀딴지'의 실패는 잊었는가, '개그콘서트' 형식의 공개쇼가 대세인데 세트코미디가 가능할까 등등….
사실 KBS '개그콘서트'의 독주가 10년 넘게 이어져오면서 이를 보완하는 형식의 개그프로그램이 다양하게 시도됐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개그맨들의 가장 큰 목표는 콘서트 형식이 아닌 '스튜디오 녹화 방식'의 부활이었다.
2009년 KBS '희희낙낙'을 주도했던 개그맨 김준호(35)는 "콘서트 방식은 청중의 반응이 즉각적이기 때문에 개그맨들의 능력을 온전하게 보여주기 힘들어 단명한다"며 "때문에 스튜디오 녹화방식의 제작시스템이 부활해야 개그의 발전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개그콘서트'의 아성은 깨지지 않았고 시청률 문제로 심야 개그방송은 찬밥 대접을 받기 십상이었다.
지난 3일 새벽 첫 방송한 MBC의 '난생처음'은 이 같은 부담감에 전혀 굴하지 않고 태어난 기묘한 프로그램이다. 데뷔 무대만 보고 성공을 점치기 어렵지만, 저렴한 제작비와 심야시간이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어깨에 힘을 빼고 만든 충분히 실험적인 작품"이라는 평가엔 이의를 달기 힘들 정도의 수작이었다.
실험적 개그로 호평 받은 개그쇼 난생처음 ▶① 가수와 개그맨, 그리고 MC의 성공적인 조화
"망가지며 웃기는 게 아니라 도도하고 세련된 느낌으로 충분히 웃길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캐릭터가 바로 호란이다."(전성호 PD)
개그프로 제작진의 최대 고민은 '한계가 뻔히 보이는 출연진(개그맨)의 한계를 과연 무엇으로 극복하느냐'이다. MBC '무한도전'의 경우 막대한 제작비와 뚜렷한 캐릭터로 다양한 소재와 배경을 선보일 수 있지만 세트 코미디는 순전히 제작진과 출연진의 호흡에 기대어 만들어야 한다.
이 때문에 새로운 인물(캐릭터)의 등장이 관건인데 제작진의 선택은 클래지콰이의 호란이었다. 가수 호란은 매력적인 방송인이다. 심리학과 출신의 재원이며 대중성과 인디의 경계에 서서 지적인 이미지를 쌓아왔다.
그런데 그가 개그쇼의 안방마님 자리를 꿰차고 본격적인 코미디를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녀의 개그가 충분히 지적이고 웃겼다는 거다. 특히 심리학 용어와 시사용어를 적절하게 사용한 대목은 고급 토크쇼를 보는 듯 흥미로웠다. MC 정형돈과 길, 그리고 개그맨(정주리 변기수 김경진)과도 적절히 조화를 이뤘다.
'난생 처음'의 최대성과는 '호란의 재발견'이다.
호란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 ▶② 부담 없는 지적 개그의 동반자…정형돈의 힘!
무려 5년에 걸친 도전 끝에 MBC '무한도전'의 평범남 7명의 캐릭터가 성공 궤도에 진입하자 다른 방송사들도 이들을 경쟁적으로 영입하기 시작했다. SBS의 '하하몽 쇼'나 케이블의 '거성쇼'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미친 존재감'이란 반어적 수식어로 널리 알려진 정형돈(32)은 예외적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밋밋한 예능인으로 분류돼 왔다. 사실 정형돈만큼 웃길 줄 알면서 지적인 이미지를 갖춘 개그맨도 흔치 않지만 '단독샷'이 약하는 이유로 공중파와 케이블을 오가는 'B급 이미지'를 유지해왔다.
그런데 힙합그룹 리쌍 출신인 길(본명 길성준·33)과 만나면서 정형돈의 어색한 이미지가 상쇄됐다.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며 상승효과를 불러온 셈이다. 최근 '무한도전'에서 가장 흥미로운 조합이 '길-정형돈' 커플이었는데 '난생 처음'에서 그들의 B급 정서를 적절하게 유머로 풀어낸 것이다.
첫 방송에서 선보인 이들의 부담 없는 개그는 "케이블 TV를 보는 것 같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의 'SNL' 같은 심야토크쇼처럼 어깨에 힘을 뺀 채로 시청자들을 미소 짓게 만드는 마력을 선보였다.
가수와 개그맨이 어우러진 지적인 토그 개그 ▶③ 노래와 추억, 그리고 위트의 경연장
또 한 가지 주목할 대목은 가수들의 대거 등장이다.
1회의 중심 소재는 1987년에 데뷔했다는 시나위 출신 김종서(45)였다. 1990년대 최고의 록 스타가 "마이크 보다 설거지를 자주해 주부습진에 걸렸다"라는 표현과 "방송사 화장실에서 PD를 만나 녹화 3일전에 섭외됐다" 고 능청을 떠는 장면은 이 프로그램의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30대 이상 세대의 시청자들에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그간 예능 프로그램은 지나치게 20대 스타들, 그것도 배우들을 중심으로 짜여진 측면이 없지 않다. 브라운관 안에서 망가지며 놀 수 있는 권리조차 예쁜 미녀 걸그룹 멤버들에게만 주어졌던 것이다.
'난생처음' 제작진은 "예능감과 음악성, 연기력이 뒷받침되는 최고의 게스트들을 섭외해 그들이 직접 개그쇼에 참여한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실제로 '난생 처음'은 한 물 갔지만 세상 경험이 풍부하고 지적인 예능인들이 즐겁게 놀 수 있는 '개그 토크쇼'로 탄생했다. 그 안에서 펼쳐지는 게스트의 콘서트도 MBC '라디오 천국'처럼 맛깔스러웠다.
이와 같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난생처음'은 적지 않은 약점을 드러내 보였다. 특히 일부 마니아 세대에 집중할 경우 단명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전혀 새로운 장르'를 '저렴한 제작비'로 '신선하게 개척해냈다'는 점에서 박수 받을 만 하다.
정호재 기자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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