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고의 촬영장 분위기 덕에 연기 사는 듯
● "유승호, 서우는 신이 주신 배우"
● 악역연기에 대리 만족 느껴
"어휴, 저희 진짜…. 요즘 드라마들이 다들 스케줄 빠듯하게 찍긴 하지만 저희는 정말 심해요. 지금 제 앞에 있는 대본도 불과 몇 시간 전에나 나왔는걸요. 요즘 하루에 3시간쯤은 자나 몰라요."
50부작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대장정. MBC 주말드라마 '욕망의 불꽃'에서 주인공 윤나영 역을 맡은 배우 신은경(37)은 이제 그 여정의 5분의 1쯤을 달려온 소감을 묻자 손부터 내저었다. 5일 서울 여의도 MBC에서 만난 그는 그럼에도 표정이 밝아보였다.
"그런데도요, 신기하게 피곤하지가 않아요. 사실 극 초반부에 조폭들과 싸우는 신에서는 입 안을 다치기도 하고 매회 감정 연기하기도 쉽지 않은데 현장에서 일이 너무 잘 진행되니까 그런가 봐요. 스태프들이 정말 프로라 현장에서 우왕좌왕하지 않거든요. 배우들도 최고고요."
그가 갑자기 기자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스태프들이 대개 '선덕여왕'팀에서 오셔서…"라고 말하며 무슨 뜻인지 알지 않느냐는 듯 눈을 찡긋거렸다. 최고의 인기를 누린 대하드라마를 제작한 팀답게 내공이 대단하다는 뜻 같았다.
현재 11%대를 유지하고 있는 이 드라마의 시청률은 상승세를 탈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들의 야심과 서로간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배우들의 연기력이 절정에 이른데다 동 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하던 SBS '인생은 아름다워'도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 사랑받다보니 연기도 잘 나와
그가 연기하는 윤나영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가족마저 희생시키는 지독하게 못된 캐릭터다. 집안끼리의 약속으로 재벌 집에 시집가기로 된 언니를 시샘해 언니를 사랑하는 남자를 꼬드겨 겁탈하게 하고 이 충격으로 아버지마저 숨지게 된다.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혼전임신으로 가진 딸을 출산하면서 산모와 아이의 생명이 위태로우니 제왕절개를 해야 한다는 의료진의 설득에 "시집도 안 갔는데 배에 자국이 남으면 안 된다"며 자연 분만을 감행한다. 재벌2세 남편이 결혼 전 사귄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겼다고 고백하자 두 사람을 설득해 자신이 낳은 것처럼 위장하는 '간 큰' 여자이기도 하다.
- 시댁 식구 앞에서는 순진한척 하다가 뒤돌아서자마자 입술을 바르르 떨며 못된 표정을 짓는 카멜레온 같은 연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안 그래도 대본이 도착했다는 얘기에 e메일을 열어볼 때마다 얼마나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데요. 오늘은 또 어떤 내용을 찍을까 긴장이 돼서요. 빈말이 아니라 단연 대한민국 최고라 할 수 있는 현장 분위기 때문에 버티는 것 같아요. 사실 배우가 혼자 분석하고 감정을 훈련한들 현장에서는 그 준비한 것의 50%도 연기하기 쉽지 않거든요. 저희 촬영감독님은 카메라 무빙 NG를 안내려고 어깨에 담이 생길 때까지 찍으세요. 연기에 몰입해야 하는 신에서 NG가 많이 나면 배우의 감정이 닳아버릴까봐요. 이런 배려 덕분에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 같아요."
- 촬영장 분위기 메이커는 누구인가요.
"전 조민기 오빠가 이렇게 웃기신지 몰랐어요. 처음으로 연기 호흡을 맞춰보는데 정말 천재가 아닐까 싶어요. 어떤 얘기라도 그 분이하면 다 웃기거든요."
조민기는 디씨인사이드의 드라마 갤러리를 통해 촬영 분위기를 전하고 배우들 사진을 올리는 등 온라인 홍보맨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자판도 직접 못 칠 정도로 컴맹이라는 신은경 역시 동생을 시켜 팬들을 향한 감사의 글을 올렸다.
"저희 촬영장이 워낙 긴박하게 돌아가다 보니 따로 리딩할 시간이 없어요. 그런데 민기 오빠와 얘기를 나누다보면 '아 이렇게 연기해야 겠구나'하고 답이 나올 때가 많아요. 그렇게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분위기가 참 좋아요."
- 촬영장에서 극중 숨겨진 딸로 나오는 서우 씨가 '엄마'라고 부르고 신은경 씨가 서우 씨에게 전화해서 연기에 대한 느낌을 얘기해주기도 한다고 들었어요. 이렇게 배우들끼리 교류하는 게 흔한가요?
"제 딸인데 당연하죠. 제가 엄마니까요."
- 극중 아들로 나오는 유승호 씨와 서우 씨의 연기를 평가한다면?
"화면에서도 보면 아시겠지만 이 친구들 너무 신비롭지 않아요? 정말 사람 같지 않잖아요. 어디 외계에서 이슬만 먹다 온 것 같고, 만화영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고…. 음, 뭐랄까 손에 꽉 쥐면 깨질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이렇게 신비로움을 가진다는 건 신이 주신 최고의 혜택이예요. 배우로서도 많이 부러운 부분이고요."
마침 촬영을 마친 유승호가 인터뷰 장소에 얼굴을 보였다. 선배 연기자인 신은경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들른 듯 했다. '버선발로 뛰어간다'는 말을 연상케 할 정도로 반갑게 달려 나간 신은경은 유승호를 따뜻하게 껴안아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마치 어린 아들을 대하듯 귀여워죽겠다는 듯한 말투로 작별인사를 건넸다.
이 장면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기자에게 그는 "우리 촬영장에서 허그는 일상적인 일"이라고 설명했다.
"제가 이렇게 선후배 연기자, 스태프들을 안아주기 시작하니 처음에는 좀 익숙지 않아 하시더라고요. 지금요? 지금은 다들 그러려니 하고 서로 안아주고 있어요."
▶ 처음 하는 악역 연기에 패션 변신까지
드라마 게시판과 디씨인사이드 갤러리 등에는 선과 악의 경계를 무색케 할 정도로 시시각각 변하는 신은경의 눈빛 연기를 칭찬하는 팬들의 글이 잇따르고 있다.
- 최근 부산국제영화제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올리버 스톤 감독도 '조폭 마누라'에 출연한 신은경의 눈빛이 인상적이었다고 칭찬했어요. 그 기사 보셨나요?
"기사는 못보고 누구한테 전해 들었는데 정말 의외예요. 2004년 '조폭마누라2' 촬영을 하면서 한 쪽 눈을 다치는 바람에 이 눈은 현재 시력이 거의 마이너스 5.25거든요. 잘 보이지도 않는데 눈빛 연기라니 감사할 따름이죠."
- 그래도 연기 잘한다는 말 들으면 기분이 좋으시죠?
"나이 든다는 게 좋다는 걸 이럴 때 느껴요. 어렸을 땐 중요한 신이 있어도 어떻게 하고 싶다고 주장을 못했거든요. 그러면 현장 분위기에, 또 시키는 대로 딸려가게 되고 마음에 안들면 우울해지고…. 배우는 가슴으로 연기해야 하는데 이런 일로 우울해지면 연기에 드러나요. 지금은 제 스스로 마음에 드는 연기를 할 수 있도록 주장할 수 있어서 좋죠."
- 캐스팅 당시에는 스태프들이 신은경 씨의 기용을 주저했던 것으로 알려졌어요. 윤나영 처럼 복합적인 성격의 캐릭터를 연기한 적이 없어서 검증이 안됐다는 이유를 들었는데 기분이 나쁘진 않았나요.
"(손사래를 치며) 아니요, 당연한거죠. 지금까지 제가 해온 역할이 단선적이었거든요. 사실 악역을 맡은 것도 처음이에요. 정하연 작가님이 고집해주셔서 결국 이 팀에 합류하게 됐죠. 그래서 작가 선생님이 써주신 대로 토씨하나 지문하나 틀리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캐릭터에 대해서도 제 나름대로 함부로 생각하거나 정의하지 않으려고 하고요."
그는 데뷔 25년차다. 그러나 악역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해 방영된 MBC 아침드라마 '하얀 거짓말'에서는 모성애로 가득한 비련의 여주인공 역을 맡았다. 180도 달라진 캐릭터에 적응하기 어렵지는 않았을까.
"악역에 매력을 많이 느껴요. 사실 '하얀 거짓말'을 촬영할 때는 개인적으로 힘든 일도 많았고 캐릭터도 너무 우울했거든요. 첩첩산중이란 표현이 딱 적확해요. 현실은 물론, 드라마에서마저 어디 하나 탈출할 곳이 없고 눈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눈물 흘리는 연기를 하다보니 우울증이 오더라고요. 몸무게도 10kg이나 줄고요. 그런데 시원하게 욕망을 다 표출하는 나영이 역할을 맡으니 후련하기도 하고 대리만족도 느껴요."
신은경은 이 드라마에서 패션 면에서도 변신을 시도했다. 재벌가에 시집간 며느리 역할을 소화하는 윤나영의 패션은 '청담동 며느리룩'으로 불리며 또래 여성들 사이에 인기를 얻고 있다.
- 패션으로 화제가 되면 여배우로서 기분이 좋지 않나요?
"네, 그렇죠. 지금까지 중성적인 역할을 많이 맡아서 예쁜 옷을 입을 기회가 많지는 않았거든요. 이렇게 스모키 메이크업을 하는 것도 처음인데 다들 칭찬해주셔서 기분이 좋더라고요. 그런데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도 안했어요. 지금은 시부모님이랑 같이 사니까 '끼'를 숨기고 있지, 앞으로 계속보시면 나영이가 훨씬 더 화려하게 변신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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