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랑 까진 여고생, SM(새디즘과 마조히즘)을 즐기는 변태 엄마, 인형을 사랑하는 오뎅 장수, 복장 도착증을 가진 국어 교사, 그리고 자신의 물건이 제일 크다고 믿는, 그래서 여자 친구도 늘 자신에게 대만족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경찰 공무원…. 이 중 내가 속할 수 있는, 아니 최소한 공감할 수 있는 그룹은 어디일까.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그리고 이 글을 읽으실 독자들 중에도 아마 이런 해괴한 그룹에 속한다고 스스로 여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저의 오만이라면 가차 없이 지적해 주시길). 넘치는 정보의 바다 속에서 간접 경험은 해 보았을지언정, 또는 은밀하게 일정부분 교집합을 느낄 수는 있을지언정, '저게 바로 내 이야기'라고 박수를 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 '저게 바로 내 이야기'라도 대 놓고 박수를 치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을 '성적 소수자'라고 부른다.
발랑까진 여고생과 여자보다 인형을 좋아하는 오뎅 장수. 그들의 사랑은 개연성없이 '급 해피엔딩'을 맞는다. ▶성적 소수자들의 은밀한 속사정
이 들도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어둠 속으로 숨고, 집 안으로 숨고, 한복으로 감싸고, 붓글씨로 위장한다. 당당하게 드러내놓고 자신들을 일반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햇빛 아래로 나서는 순간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기봉아, 우리 그냥 지옥 가자."
새 영화 '페스티발'은 '천하장사 마돈나'로 인상적인 데뷔를 했던 이해영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다. 이해준 감독과 공동연출을 했던 전 편에서 '젠더 소수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담아내었던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는 우리가 흔히 '변태'라고 낙인찍는 '섹스 소수자'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내고 있다.
이 독특한 사람들의 면면은 이렇다. 자혜(백진희 분)는 서울의 한 점잖은 동네에 사는 여고생이다. 그런데 '어리면 좋고, 발랑 까지면 더 좋은 거 아니에요?'라고 대차게 되받는, 한마디로 무서운 여고생이다. 그는 동네에서 오뎅을 팔고 있는 상두(류승범)를 좋아한다. 본격적으로 돈을 벌기 전에 첫 순정을 상두에게 바치고 싶은데, 웬걸, 상두는 사람이 아닌 인형을 좋아한다.
자혜의 엄마 순심(심혜진)은 한복집을 한다. 오랜 동안 죽은 남편이 남기고 간 빚을 갚으며 (아까 그 발랑 까진) 딸을 키우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을 방문한 보일러 수리공(성동일 )을 만나게 되고, 단정하게 꼭꼭 묶은 한복 고름 아래로 꿈틀거리는 SM 본능을 발견한다.
광록(오달수)은 자혜의 학교 국어선생님이다. 붓글씨를 즐기고 결혼기념일을 챙길 줄 아는 성실한 가장이지만, 어느 날 아내의 선물로 산 여자 속옷을 보고 색다른 욕구에 눈을 뜨고 만다. 그리고 아내가 교회에 가는 날이면, 슬쩍 숨겨 놓은 아내의 속옷을 입고 집안을 활보한다.
마지막으로 경찰관인 장배(신하균)와 여자친구인 지수(엄지원). 장배는 자신의 물건과 성적 능력에 지수가 무조건 만족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때로는 무례하고 때로는 지저분한 자신의 마초적 행동은 남성성의 발현일 뿐이다. 지수가 질색을 하건 말건 그 것은 중요치 않다. 이런 참이니 지수가 바이브레이터를 배달시킨 것을 발견했을 때의 충격은 당연히 메가톤 급이다. 술을 한껏 먹은 날, 그는 지수를 윽박지른다.
"그냥 먹던 거 먹어라, 응?"
정숙한 한복 고름 아래로 꿈틀대는 SM본능을 주체하지 못하는 순심(심혜진 분). ▶'종합선물' 같은 섹스 코드
이들은 모두가 한 동네에 모여 살고 있다. 평범하고도 점잖은 소시민이 모여 사는 동네다. 외견 상 이들의 모습도 보통의 이웃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족의 일원이자 사회의 일원으로, 우리 주위에서 늘 마주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다. 한낮의 햇볕 속에서 이들은 정상적인 다수다.
하지만 타인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는 이들만의 세계가 있다. 기봉의 철물점 안에는 기발한 상상력이 가득 담긴 SM 기구들이 들어차 있고, 상두의 집에는 리얼 돌과 연인처럼 찍은 사진이 도배되어 있다. 광록은 여자 속옷 가게를 어슬렁거리기 일쑤이고, 장배의 컴퓨터 안에는 교복을 입은 여자가 등장하는 야동이 가득하다. 이들은 행여 남에게 들킬까 꼭꼭 숨겨 놓은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각자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며 살아간다.
노골적으로 섹시 코미디를 표방한 영화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 영화처럼 다양한 섹스 코드가 담겨있는 작품이 일찍이 있었나 싶다. 노출은 없으되 마음껏 야한 이 영화는 관객들이 민망해 하지 않을 만큼의 수위를 지키는 점잖음(?)도 보여준다.
시종일관 경쾌한 분위기 속에는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것같이 재미있는 설정이 그득하다. 대사 하나 소품 하나에도, 호기심 많은 관객이라면 슬쩍 웃음을 터뜨리게 될 장치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감독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아는 만큼 보이리라!"
심혜진, 신하균, 엄지원, 류승범, 성동일, 오달수 등 쟁쟁한 배우들의 연기 또한 인상적이다. 꼭 끼는 검은 가죽옷을 입고 당당하게 채찍을 휘두르는 심혜진의 카리스마는 관객들마저 복종하게 만들고 싶을 만큼 압도적이다. 오랜만에 '프란체스카'의 환생을 보는 듯 하다.
신예 백진희의 발칙한 연기나 류승범과 성동일의 능글맞은 관록, 그리고 오달수의 수줍은(!) 모습 역시 사랑스럽다. 몸을 사리지 않는 중년 배우들의 변신과 신인배우들의 적절한 조화. 여기에 오래된 연인으로 나오는 엄지원, 신하균 커플은 자칫 붕 떠 갈 수도 있는 극의 분위기에 안정감을 더 하는 중심 추의 역할을 한다.
멀쩡한 국어선생님이자 성실한 가장인 광록(오달수 분)은 남몰래 여자 속옷에 흥분하며 성적 욕망을 채운다. ▶교훈적인 메시지, 강박관념으로 느껴져
그런데 아쉬운 건, 여기까지라는 것이다. 소재는 야무졌으되 알맹이는 부실한 느낌이다. 다이빙 보드에서 도움닫기를 있는 힘껏 하고는 회전 한번 하지 않고 조용히 물 속으로 사라지는 것에 비할 수 있겠다. 민감할 수 있는 소재를 민감하지 않게, 위험하지만 위험하지 않게 풀어낸 재치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각각의 커플이 가지고 있는 스토리 라인이 유기적인 결합을 하지 못하고 단순히 나열되어 버린 것은 극의 후반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커플 들 간 유기적인 화학작용이 없다 보니 갈등이 부족하고, 갈등이 부족하다 보니 드라마가 약하다. 그래서 '우리 모두 각자 잘 살자' 라고 외쳐대는 마지막의 해피엔딩은 급작스럽고 억지스러워 보인다. 오랜 동안 갈등을 겪어왔던 커플이 반성의 편지 한 장에 '우리 집에 가서 하고, 화해하자'라며 격하게 화해하는 장면이나, 그토록 인형을 사랑하던 상두가 갑자기 자혜에게 마음을 열고 키스를 하는 장면에선, "뭐야, 나만 이해 못 한 거야?" 라는 질문이 튀어 나오기도 한다.
더구나 "넌 얼마나 깨끗하길래" 라거나, "세상에는 변태 엄마도 있는 거야" 라거나, "니들이 뭘 알아? 남한테 피해만 안 주면 되지" 등등, 너무 자주, 그리고 너무 노골적으로 남용되는 식상한 외침들은 감독이 교훈적인 메시지를 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마저 들게 한다.
성적 소수자라 해서, 지옥에 가야 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이 당연한 명제를 오히려 감독 스스로 제도권의 시선에서 바라 본 것은 아닐는지.
정주현 영화진흥위원회 코디네이터 janice.jh.ch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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