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여의도’는 여의도 증권시장 현장에 대한 제작 전 답사와 취재가 얼마나 충실했을지 다분히 의심스러운 영화다.
사진 제공 필름마케팅캠프
얼마 전 법조 출입 선배와 모처럼 조촐한 술자리를 갖다가 영화 '부당거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법조 취재 경력이 다른 어떤 현역 기자보다 탄탄한 그 선배의 감상 소감은 한마디로 "디테일에 감탄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경찰, 검찰, 언론을 소재로 한 류승완 감독의 올해 신작 '부당거래'는 이야기의 짜임과 호흡이 탁월한 영화입니다. 몇 년 뒤에 다시 보고 싶어질 만큼 뛰어난 작품이라 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표를 사서 2시간 정도 극장에 앉아 있는 한차례의 소비 행위가 아깝게 여겨질 영화는 아닙니다.
이 영화에 대한 선배와 저의 공통된 의견은 '디테일의 승리'였습니다. 영화의 내용에 대해서는 시각에 따라 여러 가지 비판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경찰과 검찰, 또 그 두 출입처를 경험해 본 언론 종사자가 이 영화의 구체적 상황 묘사에 대해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할 여지는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선배는 "그쪽 사람들만 쓰는 은어, 독특한 뉘앙스나 제스처를 감칠맛 나게 영화 대사에 자연스럽게 녹여낸 장면들이 특히 인상적이었다"고 했습니다.
영화가 꼭 현실의 복사판을 보여줘야 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영화가 담아낸 대상'에 따라서 크게 달라지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앤 해서웨이와 스티브 카렐이 주연한 코믹액션영화 '겟 스마트'를 보면서 "저런 멍청한 비밀정보기관이 세상에 어디 있냐. 사실성이 떨어진다"고 불평할 관객은 없습니다. 같은 소재에서 범위를 넓혀 '007' 시리즈나 '미션 임파서블', 이보다 가일층 진지한 '제이슨 본' 시리즈에 대해서도 "사실성"을 운운할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봅니다. 그런 대화가 적합하지 않기도 하거니와 사실성을 판단해 줄 주체가 딱히 없기 때문입니다.
국가정보원의 자문을 받았다는 '7급 공무원'도 디테일에 대해 심도 있게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은 영화였습니다. 개봉 당시 국정원 직원을 섭외해 프리뷰를 작성하다 몹시 애먹었던 기억이 끔찍하게 생생합니다. 첩보기관 직원 입장에서는 영화 속 디테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기본 업무수칙 위반이었으니까요. 어쩌면 첩보원이라는 직업은 영화 속에서 그럴듯하게 대강 버무려 내놓기에 다른 무엇보다 용이한 소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드러내놓고 가타부타 책임 있게 평가할 수 있는 '현역'이 사실상 한 명도 없으니 말입니다.
다른 직업에 대한 영화는 어떨까요. 장르와 무관하게 무성의한 디테일에 대한 호된 지탄을 받을 가능성이 시나리오 구석구석에 지뢰밭처럼 깔려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자본시장의 잔인한 굴레에 치여 극단적인 파멸의 길을 걷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잘 엮었다면 그럴듯했을’ 소재다. 하지만 무성의한 디테일이 일찌감치 관객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사진 제공 필름마케팅캠프 저에게 2일 개봉한 '여의도'는 초장부터 지뢰를 터뜨려버린 영화였습니다. 성실한 펀드매니저 황우진 과장(김태우)이 생활고에 찌든 끝에 극단적인 범죄를 저지르고 파멸한다는 이야기. 사이코패스 주인공이나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는 환영(幻影) 친구, 남편 빚 때문에 호스티스로 나서는 아내 등에 대한 주요 설정은 못마땅한 중에도 그냥 그러려니 싶었습니다. 학생이 선생을 구타하고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고 있는 난장판에서 충분히 상상 가능한 내용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혀를 찬 것은 황 과장의 출근 장면이었습니다. 그가 우물쭈물 출입카드를 대고 들어가는 곳은, 한국예탁결제원 로비더군요.
한국예탁결제원은 국내 대부분의 증권을 예탁 받아 관리하는 금융위원회 산하의 준정부기관입니다. 건물이 분명 '여의도'에 있긴 하지만, 이곳으로 출근하는 증권투자사 펀드매니저는 없습니다.
여의도 증권시장 현장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아볼 턱이 없는, 아주 작은 티에 불과한 장면을 갖고 왜 자잘하게 공연한 트집을 잡느냐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 눈에는 이 짤막한 장면이 영화 전체의 품질을 가름하게 만드는 결정적 단서로 비쳤습니다. 아무리 봐도 이건 몰라서 저지른 실수가 아니라 알면서 대충 때우려 한 오류이기 때문입니다. 촬영 현장에서 장소섭외 등 해결하기 어려운 제약이 있었다면 그리 중요하지 않은 출입구 장면을 아예 빼고 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적어도 여의도에서 증권 업무를 하고 있는, 또는 해본 경험이 있는 관객이라면 누구나 이 짧은 장면에서 '에이 저거 뭐야' 할 것이 뻔했을 테니 말입니다. 게다가 제목이 '여의도'인데…. 누구보다 먼저 고려해야 했을 관객집단 역시 여의도를 중심으로 한 증권업무 종사자가 아니었을지.
겨우겨우 끝까지 관람한 영화의 전체적인 만듦새는, 참담한 줄거리 못잖게 참담했습니다. 김태우 등 솜씨 좋은 배우들의 호연이 없었다면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기 어려웠을 겁니다.
영화의 이야기를 끝까지 굴러가게 만드는 버팀목은 배우들의 좋은 연기.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그 노력이 안쓰럽다.
사진 제공 필름마케팅캠프 영화는 주어진 촬영기간 안에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하면서 어떻게든 목표했던 영상을 만들어 내 대중 앞에 선보여야 하는 창작물입니다. 그 책임자인 제작자와 감독의 스트레스는 상상을 뛰어넘을 것입니다. 결국 그 어려움에 맞서 집요하게 빚어낸 디테일은 거의 예외 없이 관객의 큰 박수를 받기 마련입니다. 감독과 스태프들이 발로 뛰며 사전에 현장을 열심히 취재한 '티'는 스크린에서 자연히 배어나게 되니까요.
'의형제'의 장훈 감독의 데뷔작으로 내놓았던 '영화는 영화다'는 "영화는 영화일 뿐, 현실과 헷갈리지 마라"는 명제를 내세운 작품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작품 속에서 영화촬영 현장이나 유흥주점을 그려낸 상황 묘사의 디테일은 조금도 허황된 분위기 없이 집요할 정도로 치밀했습니다. 부분 부분이 치밀하게 조직된 이야기다보니 전체적인 균형감도 자연히 살아났습니다.
최근의 한국영화에서는 어쩐지 '꼼꼼함'에 감탄하게 되는 경우가 드물어졌습니다. '부당거래'가 더 좋게 보였던 것은 오랜만에 경험하는 품질 좋은 디테일에 대한 반가움도 한몫 했을 겁니다. 자동화기 몇 방에 불바다가 되는 '영웅본색' 속 부산항만, 말쑥한 차림으로 대학원생들 앞에 서서 학부 1학년도 비웃을 내용의 강의를 하는 '두 여자' 속 건축학과 교수를 보면 한숨이 나오는 한편 원망스러운 생각도 듭니다. 과연 그렇게 추구하기 어려운 디테일이었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하긴 '건축드라마'를 내세우며 현판에 '집 재(齋)' 자가 아닌 '재료 재(材)' 자를 쓴 TV에 비하면 영화는 훨씬 나은 편이지요.
디테일에 대한 질문에 류승완 감독은 "내가 만드는 게 아니다. 데뷔작부터 경찰이 나오는 영화('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2000년)를 만들었지만 지금도 경찰 계급체계가 어떤지 잘 모른다"고 했습니다.
"경찰 담당, 검찰 담당, 언론 담당 등 전담 스태프를 두고 책임과 권한을 일임하는 거죠. 장면을 만들거나 대사를 조정할 때마다 담당 스태프를 불러놓고 '이거 다 맞아? 정말 맞아? 나중에 확인해 보고 아니면 너 나한테 정말 죽는다~'고 합니다. 하하."
맞춤법만 잘 지킨다고 좋은 작가가 아니고, 디테일만 잘 잡아낸다고 좋은 감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사건을 다룬 기사를 읽다가 맞춤법이 틀린 문장이 눈에 띈다면 글 전체의 신뢰도가 확 떨어지죠. 사소한 한 글자라도 그 '오류 없음'은 기사 한 건, 신문 한 부가 나오기까지 그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이 얼마나 치열하고 성의 있게 맡은 바 일을 수행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쉬운 판단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디테일 역시 좋은 영화의 충분조건은 아니겠지만, 필요조건임에는 틀림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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