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강의를 마치고 교탁에서 강의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어느 여성분이 정성스레 포장된 선물을 수줍은 듯 건네준다. “지금까지 고마웠어요. 선생님, 이건 뇌물이 아니에요.” 얼굴을 붉히며 말을 마치고는 강의실 밖으로 무엇인가에 쫓기듯이 나간다. 가방을 챙기고 쫓아갔지만 그 여성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문득 예전에 그 강의실에서 ‘뇌물의 논리와 선물의 논리’를 강의했던 일이 떠올랐다. 아마 이 여성은 그때 내 강의가 무척 인상적이었나 보다. 당시 나는 선물과 뇌물의 차이점을 설명했다. 누구나 알다시피 뇌물과 선물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대가(代價)의 유무’에 달려 있다. 타인에게 무엇인가를 바라고 주었다면 그것은 뇌물이다. 반면 어떤 것도 바라지 않고 주었다면 그것이 바로 선물일 수 있다. 그러나 뇌물과 선물의 차이는 생각보다 그렇게 명료하지 않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선물로 주었다고 하자. 그러나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우리는 자신이 주었던 것이 선물이 아니라 단지 뇌물이었다는 것을 자각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보자. 직장 동료의 생일날 그에게 멋있는 정장을 한 벌 선물로 주었다. 분명 그 당시 어떤 대가도 없이 선물을 주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시간이 흘러 이번에는 내게도 어김없이 생일이 찾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 동료는 내게 평범한 노트 한 권을 생일 선물로 주었다. 내가 행복한 마음으로 그 노트를 받을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조금이라도 불쾌한 느낌이 든다면, 다시 말해 정장 한 벌과 노트 한 권의 가격을 비교하게 된다면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동료에게 정장을 선물로 주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단지 뇌물에 지나지 않았다는 불행한 사실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도 이점을 명확히 알고 있었나 보다.
선물이 존재하려면 어떤 상호 관계, 반환, 교환, 대응 선물, 부채 의식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만약 타인이 내가 그에게 주었던 것을 내게 다시 돌려주거나 나에게 고마움을 느끼거나, 또 반드시 돌려주어야만 한다면, 나와 타인 사이에는 어떤 선물도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주어진 시간(Donner le temps)’
우리는 동료로부터 받은 선물의 금액을 예상해 상응하는 가격의 선물을 고민한다. 생일이나 연말연시에는 상대방의 중요도를 헤아려 선물에 들어갈 경비를 따지기도 한다. 밸런타인데이에 선물을 받았다면 화이트데이에 이에 대응하는 선물을 한다. 선물이란 이름으로 행해진 우리의 모든 행위가 사실은 선물이 아니었던 셈이다. 데리다의 말처럼 선물은 ‘상호 관계, 반환, 교환, 대응 선물, 부채 의식’ 등등이 없어야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물에 대한 그의 냉정하지만 옳은 진단을 듣는 순간 우리는 선물을 주고받고는 있지만 사실 진정한 선물을 한 번도 주고받지 못했다는 것을 실토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허접함이 폭로되는 걸 누가 좋아할까. 그렇다고 해서 데리다의 기준이 너무 높다고, 그래서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폄하해서는 안 된다. 옳은 것은 옳은 것일 뿐이다. 옳은 것을 하지 못하는 자신의 천박함을 탓해야 할 일이다.
지금 우리는 기부와 자선이 미덕이 되어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공감과 동감에 대한 책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출간되는 것도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기부와 자선은 일면부지의 타인을 위한 선물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가족이나 애인, 혹은 가까운 동료에게도 선물이란 이름에 걸맞은 선물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한 적이 없다는 데 있다. 그런 우리에게 기부와 자선이란, 사실 너무 버거운 짐일 수 있다. 선물도 제대로 못해 본 사람이 어떻게 기부와 자선을 그 이름에 걸맞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단순히 사회적 유행이어서 누군가에게 자선과 기부를 베푸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사회적 명망을 얻기 위해, 혹은 정신적이거나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과시하기 위해 자선과 기부에 뛰어든 것은 아닐까. 기부와 자선 행위에 깔린 내적 논리를 신랄하게 해부했던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사람들은 박애심을 발휘하며 눈에 띄는 사회의 상처 자리를 계획적으로 봉합하려는 행정적 자선 행위를 벌인다. …기부금조차도 분배, 적절한 균형을 통해 남을 굴복시키는 행위와 결부되는데, 요약하자면 선물 받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취급하면서 그 사람을 굴복시키려는 것과 결합된다.
―‘미니마 모랄리아(Minima Moralia)’
우리는 냉혹하고 치열한 경쟁 논리가 구조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 당연히 경쟁에서 이긴 자에게 대부분의 상금이 돌아가고 패배한 자에게는 냉혹한 찬바람만이 안겨진다. 경쟁의 논리는 서로 돕고 의지해야 한다는 공동체의 정신을 하나의 미명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결국 공동체는 상처투성이가 된다. 바로 그 상처 자리에 임시 반창고를 붙이는 것이 기부와 자선 행위의 본질이라고 아도르노는 차갑게 진단한다. 구조적으로 공감과 동감이 가능한 공동체를 만들지 못하고, 표면적이고 환상적으로나마 공감과 동감의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기부와 자선 행위라는 것이다. 때리고 나서 반창고를 붙이거나, 아니면 노름판에서 알거지가 된 사람에게 개평을 주는 식이라고나 할까. 때리지 않았다면 혹은 노름판을 없앤다면, 반창고를 붙여주는 일도 개평을 주는 일도 없어질 텐데 말이다. 그래서 아도르노는 자선과 기부의 내면에서 ‘선물 받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취급하면서 그 사람을 굴복시키려는’ 승자의 의지를 발견했던 것이다.
아도르노의 이야기를 음미하다 보면 대가가 없어야 한다는 것 외에 선물이 가져야 할 또 한 가지 결정적인 조건이 떠오른다. 그것은 바로 가장 소중한 것을 타인에게 내주어야 한다는 조건이다. 노름에서 판돈을 다 거머쥔 자는 자신의 판돈을 모두 패자에게 주지는 않는다. 자신의 수익에 비해 없어도 될 정도의 작은 액수를 개평으로 줄 뿐이다. 그러니까 개평은 선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선물일 수 없는 법이다. 기부와 자선도 개평처럼 주어져서는 선물일 수가 없다.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을 때에만 기부와 자선을 선물이라고 부를 수 있다. 승자로서 얻은 소중한 상금을 내놓을 수 있을까. 기득권을 버리고 타인과 동등한 높이에서 선물을 줄 수 있 수 있을까. 무엇인가를 가지는 것으로만 행복을 가름하는 사람들에게는 무리한 주문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선물, 혹은 기부나 자선은 진정으로 소유로부터 오는 행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법이다.
전철에서 타인에게 좌석을 양보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 경우 좌석은 하나의 선물이 될 수도 있다. 어쨌든 전철에서 누구나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은 바로 좌석이니까. 타인에게 좌석을 양보했을 때 한 시간 이상 서서 가야 할 수도 있다. 자신의 소중한 좌석을 양보할 때 그만큼 우리의 다리는 피곤할 것이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행복감이 우리를 찾아온다는 점이다. ‘가난한 자에게 복이 온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을 내어주는 것, 즉 스스로 가난해지려고 하는 자에게만 행복이 찾아드니까 말이다. ‘빈(貧)’이란 한자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 글자는 ‘나누어주다’는 의미의 ‘분(分)’과 ‘조개화폐’를 의미하는 ‘패(貝)’라는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게을러서 생기는 가난과 소중한 것을 선물로 주어서 생기는 가난을 구분해야 한다. 옛사람들이 청빈(淸貧)을 강조했던 것도 선물로 발생하는 가난이 주는 행복감 때문이었다. 선물로 발생하는 가난은 소중한 것을 축적했을 때보다 더 많은 행복을 우리에게 주기 때문이다.
지인에게 건네주는 단순한 선물이든, 혹은 미지의 타인에게 행하는 자선이나 기부든 쉽게 할 일이 아니다. 그건 대가도 일절 없이 가난해지기를 자처하는 비범한 행동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물론 타인에게 주는 선물은 무엇인가를 소유하려는 사람에게는 결코 찾아올 수 없는 아이러니한 행복을 가져다준다.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생각에 잠겨 본다. 내게 수줍게 선물을 건네고 누군지 확인할 겨를조차 없이 떠났던 여성분의 마지막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건 뇌물이 아니에요!” 선물을 건네면서 그녀는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완전한 선물을 주기 위해서, 그녀는 자신의 신분도 밝히지 않은 채 부리나케 돌아선 것이다. 내가 대응 선물을 주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녀가 선물을 제대로 주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선물로 나를 행복하게 만들려고 노심초사하던 자신의 모습, 그리고 상대방이 이것을 어떻게 받을까 염려하던 모습 등등. 오직 이런 마음만이 선물을, 혹은 자선이나 기부를 가능하게 하는 것 아닐까.
강신주 철학박사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1930∼2004)☆::
지금까지 서양 형이상학 전통이 ‘아버지’ ‘국가’ ‘진리’ ‘아름다움’ 등과 같은 형이상학적 울타리를 쳐놓고 세계를 위계적으로 배열해 왔다고 말하며 이를 해체한 현대 프랑스 철학자. 전통 형이상학을 치열하게 해체한 후 말년에 그는 새로운 윤리의 구성 가능성을 진지하게 숙고했다. 저서로 ‘글쓰기와 차이(L'´ecriture et la diff´erence)’ ‘주어진 시간(Donner le temps) 1’ 등이 있다. ::동정(同情·Sympathy)☆☆::
동정이란 개념의 가장 대표적인 용례로는 ‘가난한 사람의 처지를 동정해야만 한다’는 표현을 들 수 있다. 이 경우 동정이란 개념은 마치 우리에게 동정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가 있다는 뉘앙스를 가진다. 그렇지만 이것은 동정의 원래 뜻과는 무관한 것이다. ‘sympathy’라는 개념은 ‘함께’를 뜻하는 ‘sym’과 ‘감정’이나 ‘고통’을 뜻하는 ‘pathos’로 구성된다. 그래서 동정은 주체의 능동적인 노력이 무력해지는 주체의 수동적인 경험, 즉 타인의 감정이나 고통을 공유할 수밖에 없게 된 주체의 감정 상태를 뜻하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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