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깨사]다양한 매체로 ‘수묵화 영상’ 만드는 황선숙 씨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2월 20일 03시 00분


‘1초’ 보여주기 위한 수만 번의 붓짓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 일민미술관에서 만난 황선숙 씨. “움직임에 이끌려 그림을 놓아버린 자리에서 시작한 애니메이션 작업이었는데 작업을 하다 보니 이제는 도리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신선하게 가슴에 와 닿기도 한다”고 말했다.이종승 기자 urisesang@donga.com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 일민미술관에서 만난 황선숙 씨. “움직임에 이끌려 그림을 놓아버린 자리에서 시작한 애니메이션 작업이었는데 작업을 하다 보니 이제는 도리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신선하게 가슴에 와 닿기도 한다”고 말했다.이종승 기자 urisesang@donga.com
하얀 화선지에 먹이 스며들 듯 화면 한가운데 커다란 점 하나가 명멸한다. 손바닥 위에 그려진 점은 이내 뚜렷한 색감을 지닌 사진들로 이어진다. 바닥의 돌멩이까지 그대로 들여다보이는 맑은 물 속에 담긴 다양한 모습의 손들도 빠르게 지나간다. ‘삐걱삐걱’ 노 젓는 소리와 함께 노를 젓는 누군가의 모습이 흐릿하게 그려지고, 그 위로 붓의 움직임이 느껴지는 거칠고 굵은 선 하나가 덧씌워진다. 작품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무수히 많은 선과 점들, 어린 소녀, 그리고 파도까지. 이미지와 함께 그 이미지를 담고 있는 ‘그릇’도 수묵화에서 사진으로 끊임없이 변화한다.

작가 황선숙 씨(38)는 4분짜리 ‘움직이는 그림’을 위해 3000장 이상의 정지된 수묵화를 그린다. 홍익대 동양학과를 졸업한 그는 미디어와 수묵을 접목시킨 ‘수묵 영상’을 선보이고 있다. 자신이 직접 그린 수묵화뿐만 아니라 사진과 실사필름 등 다양한 매체들도 이용한다. 그는 “우리 안의 근원과 정신성을 함축할 수 있는 전통적인 먹이 현대적인 감수성으로 얼마나 큰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지, 디지털적인 소통이 가능한지 알아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가 컴퓨터를 배운 것은 남들보다 한참 늦은 31세 때. 동양화를 더 공부하고 싶어 대학을 마친 후 중국 베이징으로 유학을 갔고 그곳에서 전시회도 한 번 했지만, 전통만을 답습하는 동양화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림 그리는 것을 포기하려는 순간 우연히 친구가 만든 실험 영화를 보게 됐다.

“그 영화를 보며 내 그림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어요. 그리고 그 움직임을 통해 내 작품이 더 많은 사람과 소통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됐죠.”

단지 그림을 움직이게 하고 싶다는 생각에 컴맹이었던 그는 컴퓨터를 배웠다. 황 작가는 “1초를 표현하기 위해 몇 시간을 그림을 그린다. 어떻게 보면 참 모순적인 작업이다. 하지만 빠르게 스쳐가는 화면들을 통해서 순간을 영원으로 담아내는 회화처럼 우리 삶에서 일시적인 체험이 주는 영원성을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은 영화관과 미술관에서 모두 상영된다. 하지만 똑같은 작품이 상영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관은 관람객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몰입해서 볼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미술관은 더 자유롭죠. 저도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고 해도 미술관에서 1분 이상 서서 보지 않아요. 그래서 미술관에서 전시를 할 때는 공간도 고려하게 되고, 다양한 시도를 더 해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는 왜 수묵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매체를 이용하는 것일까.

“그림과 사진은 또 다른 것 같아요. 그림에는 나 자신이 담겨 있다면, 사진에는 한 발짝 물러서서 본 세상이 담겨 있어요. 서로 다르게 접근해볼 수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런 반대되는 점들 때문에 더 끌리는 것 같아요.”

그는 초소형 이동형 프로젝터를 들고 장소를 이동하며 호수, 동물, 나무 등 다양한 ‘화면’ 위에 자신의 작품을 상영하는 전시를 계획하고 있다. 이 밖에 고흐의 자화상을 애니메이션화 하는 등 다양한 새로운 시도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지금 현재 우리가 바라보는 우리의 전통에는 이중적인 시각이 혼재되어 있다. 소중하다는 사실은 알지만 일상적인 의미는 전혀 찾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기회가 된다면 현대인의 얼굴을 찍은 사진이나 조선시대의 초상화 등을 통해 전통과 현대를 아우를 수 있는 시리즈를 해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는 2010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에서 중운상을 받기도 했다.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에 예심위원으로 참가했던 김지하 씨는 “그의 작품은 미국 언더그라운드 영화계의 거장 스탠 브래키지의 작업을 화선지에 옮겨놓은 듯한 인상을 준다”며 “내러티브를 가지면서도 여백의 미를 가미한 작가 고유의 스타일을 완성시켰다”고 평가했다.

미술평론가인 심상용 동덕여대 큐레이터과 교수는 “그의 작품에서 하나의 이미지는 겸허히 침묵함으로써, 자신을 넘어서는 더 큰 전체에 귀속한다. 수천으로 나뉘는 이미지는 말로 스스로를 앞세우지 않은 채 기꺼이 시(詩)와 연대하는 진정한 수묵정신의 또 다른 모습이다”고 평했다. 그는 “동양화는 선조들이 그려 온 전통과 그 의미를 존중해 섣부른 해석이나 새로운 시도를 잘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자연과 함께하며 순응하는 겸허한 한국화의 정신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다”라고 덧붙였다.

그에게 동양화가, 실험영화 감독, 비디오아티스트 등 어떤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하느냐고 묻자 그는 ‘좋은 예술가이고 싶은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제 작품이 실험영화제에서 상영되면 실험영화, 비디오아트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제 작품 성격이 명확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어떤 장르에 속해 있지도 않고요. 저는 단지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일 뿐이에요.”

더 좋은 작품을 만들려면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과 혼자 있는 시간 사이의 긴장이 늘 필요하다. 그래서 인터뷰를 해야 하는지를 놓고 한참을 고민했다고 한다. 이렇게 사람들 사이로 스며드는 것이 작품 활동에 자칫 지장을 주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번 기회를 통해 소극적인 나 스스로의 판을 깨보고 싶어서 인터뷰에 응했다”며 웃었다.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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